ESG 경영은 전담팀의 몫이 아니다. 현업 부서가 함께 논의하고 실행하는 순간, 조직은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한다. [사진 = 코리아비즈니스리뷰 DB]
ESG 조직의 위기: 왜 지금 다시 설계가 필요한가
"ESG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이미 끝났다. 2026년 현재, 기업 앞에 놓인 진짜 질문은 "ESG를 못하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로 바뀌었다.
그런데 역설적인 장면이 동시에 펼쳐지고 있다.
2026년 들어 CSO(최고지속가능경영책임자)의 역할이 점점 취약해지고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시장 변동성, 지정학 리스크, 비용 압박이 겹치면서 기업 경영진은 ESG 조직의 존재 가치를 더 냉정하게 묻기 시작했고, 고위직 ESG 담당자의 이탈과 조직 축소 사례가 잇따르면서 현장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이 두 가지 흐름이 공존한다는 사실이 오늘의 핵심이다. ESG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선언하는 조직'은 도태되고, '실행하는 조직'만 살아남는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 지금 ESG 조직 설계를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규제 측면에서도 압력은 배가됐다.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가장 큰 변화는 '평가'가 아닌 '의무화'다. 유럽의 CSRD(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는 단순히 보고서 제출에 그치지 않고, 공급망, 인권, 탄소, 리스크 관리 체계 등까지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관리하길 요구한다. 조직도 한 장과 연간 보고서로 ESG를 갈음할 수 있었던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
ESG 1.0의 실패: 조직도에는 있었지만 경영에는 없었다
많은 기업이 지난 4~5년 사이 ESG 전담팀을 만들었다. 그러나 상당수는 구조적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세 가지 실패 패턴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 같은 패턴은 ESG 평가 기준이 '공시 여부'에서 '실제 리스크·성과 반영'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과도 맞물린다.
첫 번째 실수: 홍보팀의 연장선에 조직을 뒀다.
ESG 팀이 보고서 발간과 대외 커뮤니케이션을 주 업무로 삼으면서, 실제 사업 의사결정과 단절된 '별동대'로 기능했다. 임원진이 ESG 전략을 경영 회의에서 다루지 않고, ESG 팀의 연간 보고서로 대신하는 구조가 고착됐다. 조직은 있었지만 경영의 언어가 아니었다.
두 번째 실수: 데이터 없이 목표만 세웠다.
'ESG 1.0(자발적 선언)'의 시대는 가고, 구체적인 정량 데이터로 성과를 입증해야 하는 'ESG 2.0(데이터 공시)'의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많은 기업의 ESG 조직은 데이터를 수집·검증하는 인프라 없이 목표 수치를 발표하는 데 집중했다. 탄소중립을 선언하면서도 Scope 1 배출량조차 자체 측정하지 못하는 사례가 실제로 적지 않았다. 이러한 간극은 투자자와 글로벌 바이어 앞에서 곧바로 신뢰 문제로 이어졌다.
세 번째 실수: 현업 부서를 설득하지 않았다.
ESG 조직이 별도로 존재할 뿐, 구매·생산·인사·재무 부서와의 협력 구조를 갖추지 못한 채 운영됐다. 현장에서는 ESG가 '본업 외의 추가 업무'로 인식됐고, 탄소 데이터 수집이나 협력사 실사 협조 요청은 번번이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ESG 담당자가 혼자 분투하는 동안 현업은 ESG를 '남의 일'로 바라보는 문화가 고착됐다.
2026년, 기업들이 ESG를 단순한 공시 행정이 아닌 경영 전략·운영 체계·조직문화·평가 대응으로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실패의 학습에서 나온 결과다.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조직 설계의 전제부터 바꿔야 한다.
ESG 2.0 시대의 조직 설계 원칙: 세 가지 전환
원칙 1. 거버넌스 레벨을 올려라 — CSO는 반드시 경영진이어야 한다
PwC 등 글로벌 컨설팅사의 분석에 따르면, ESG 평가 상위 등급 기업의 대부분이 CSO 직책을 두고 있다. 또한 여러 조사에서, 2020년 이후 불과 몇 년 사이 신규 CSO 선임 사례가 이전 수년간 누적된 규모에 맞먹을 정도로 급증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지속 가능 경영 리크루팅 전문 기업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 상장사에서도 CSO 직함을 가진 리더 수가 2010년대 초반과 비교해 수 배 수준으로 증가했다는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위치'다. CSO를 선임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CSO가 조직 내 어느 위치에서 어떤 권한을 갖고 있느냐가 ESG 조직의 실질적 기능을 좌우한다. CSO는 반드시 최고 의사결정자 그룹에 포함되거나 직접 보고하는 구조여야 ESG 추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실무적으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ESG 임원이 사업 전략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그 조직은 구색용이다. ESG 목표가 경영진의 KPI와 연동되지 않는다면, 실행은 요식행위에 그친다.
이사회 산하에 지속가능경영위원회를 설치하고, 경영진 보상을 기후성과와 연계하며, 임직원 교육과 참여를 확대하는 것이 거버넌스 전환의 핵심이라고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상 체계와 연동되지 않는 목표는 선언에 불과하다. ESG 성과가 임원 인사평가에 반영되는 순간, 조직 안에서 ESG의 무게감이 달라진다.
원칙 2. 중앙집중형 + 현업 분산형의 '이중구조'로 설계하라
ESG 조직 설계에서 가장 빈번한 오류는 '전담팀이 모든 것을 한다'는 착각이다. 규모가 작은 기업에서는 현실적인 선택일 수 있지만, 조직이 성장하고 ESG 요구 범위가 넓어질수록 이 구조는 필연적으로 한계에 봉착한다.
실제로 공시 의무화 관련 리포트에서도, ESG 전담 조직과 각 사업부가 역할을 나누는 이중구조 모델이 권고되고 있다. 선도 기업들이 수렴하고 있는 모델은 '허브 앤 스포크(Hub & Spoke)' 구조다. 중앙 ESG 팀(허브)은 전사 전략 수립, 데이터 통합 관리, 글로벌 평가 대응(CDP·EcoVadis·DJSI 등), 외부 검증 주관을 전담한다. 각 현업 부서(스포크)에는 ESG 담당 역할을 명확히 지정해, 탄소 데이터 수집은 생산팀이, Scope 3 공급망 관리는 구매팀이, DEI 지표 관리는 인사팀이, ESG 연계 금융 및 세제 대응은 재무팀이 직접 책임지도록 한다.
기업이 ESG 실행에 익숙해지고 일상 업무에 밀착하여 ESG를 적용하는 것이 중요해지면 현업 부서로 ESG 추진을 위임하는 경향이 나타나지만, 이 경우에도 중앙집중형 ESG팀은 전사 차원의 기회와 위기를 모니터링할 수 있어 여전히 유의미하다. 즉, '전부 위임'도, '전부 집중'도 아닌 역할의 명확한 분리와 협력 구조가 핵심이다.
이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 중앙 ESG 팀의 권한이 명확해야 한다. 현업 부서에 데이터 제출을 요구하거나 ESG 기준 준수를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조직 규정에 명시돼야 한다. 둘째, 현업 부서의 ESG 담당자가 '추가 업무를 짊어진 사람'이 아닌 'ESG 전문성을 개발하는 역할'로 인식돼야 한다. 물류 부서는 탄소 배출을 최소화하는 최적 운송 경로 설계 역량을, HR 부서는 환경 경영 가치를 실천할 인재를 선별하는 역량을 ESG의 관점에서 내재화해야 한다. 이것이 현업 ESG 담당 역할의 실질적 의미다.
원칙 3. 조직문화 내재화 없이는 조직도는 종이에 불과하다
2026년 기업들의 ESG 운영 과제 설문에서 'ESG 데이터 플랫폼 구축'과 '조직문화 내재화'가 각각 20건으로 공동 3위를 차지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기업들이 이제야 기술적 인프라와 문화적 내재화를 동등한 우선순위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문화 내재화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구체적인 실행 경로가 있다.
첫 단계는 전 임직원 대상 ESG 기초 교육의 정례화다. 어렵고 전문적인 내용을 강의식으로 전달하는 방식은 효과가 낮다. 각 부서의 일상 업무와 ESG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맞춤형 교육이 효과적이다. 구매팀에게는 공급망 실사와 EcoVadis 평가 기준을, 생산팀에게는 온실가스 배출량 산정 방식을, 마케팅팀에게는 그린워싱 리스크와 ESG 커뮤니케이션 원칙을 각각 다루는 방식이다.
두 번째 단계는 인센티브 연동이다. ESG 가치가 기업의 보상 체계, 채용 프로세스, 조직 문화와 완전히 통합돼야 한다. 주요 기업들은 'ESG 데이터 플랫폼 구축'과 '조직문화 내재화'를 기업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으로 꼽고 있다. 부서별 ESG KPI를 설정하고 이를 성과 평가에 반영하는 순간, 조직 내 ESG의 우선순위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일부 글로벌 기업들은 장애인·여성 임직원 비율 확대와 같은 다양성 지표에 대해 중장기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조직 문화와 인사 제도에 반영하고 있다. 수치가 아닌, 이처럼 측정 가능한 목표를 조직 내부의 실행 기준으로 가져오는 것이 내재화의 출발점이다.
AI가 ESG 조직에 미치는 이중 효과
2026년 현재, ESG 조직 설계에서 AI는 빼놓을 수 없는 변수가 됐다. 가능성과 위험이 공존하며,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조직은 AI를 잘못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긍정적 효과는 측정 가능하다. AI는 지속가능성 보고에 수반되는 노동집약적 작업을 자동화함으로써 CSO가 전략적 영향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탄소 배출량 데이터 수집과 정합성 검증, 공급망 리스크 스크리닝, ESG 보고서 초안 작성, 글로벌 규제 변화 모니터링 등의 영역에서 AI 도구의 활용이 빠르게 확산 중이다. 과거에 다수의 인력이 수개월을 들여 수집하던 데이터를 AI 기반 플랫폼이 훨씬 짧은 시간 안에 취합하는 환경이 현실이 되고 있다.
그러나 부작용도 현실이다. AI가 노동집약적 지속가능성 보고 업무를 대체하면서, 주니어·중급 ESG 담당자들이 경력을 쌓을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 이는 조직 내 ESG 전문 인력의 파이프라인을 약화시키는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고 채용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 딜레마에 대한 실용적 해법은 분명하다. AI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사람은 전략을 판단하며 이해관계자와 소통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이 역할 분리가 흐려지는 조직은 단기적 효율을 얻는 대신 중장기적 ESG 역량을 잃는다. ESG 조직 내에 AI 도구를 도입할 때, 반드시 주니어 인력의 학습 경로를 함께 설계해야 하는 이유다.
규제가 조직 설계를 강제하는 시대: 2026년의 새 기준선
이제 ESG 조직 설계는 자발적 선택이 아닌 규제 대응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기업에게 이 압력은 더욱 직접적이다.
2026년부터 EU CBAM은 본격 시행 단계에 들어간다. 과도기에 넓게 허용되던 기본값(default value) 활용이 점차 제한되고, 공장별·제품별 실측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산정과 제3자 검증 요구가 크게 강화되고 있다. 탄소 배출 데이터를 충분히 제출하지 못하는 기업은 수출 과정에서 비용·통관 측면의 불이익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되는 흐름이다.
이는 ESG 조직이 단순 보고서 작성이 아니라, 실제 데이터를 수집·검증·관리할 수 있는 운영 능력을 갖추도록 요구하는 방향으로 규제가 설계되고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탄소 데이터 담당자, 공급망 실사 담당자, 외부 검증 관리자가 실질적 기능을 하지 않으면 규제 대응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법무법인 율촌의 분석에 따르면, "ESG 규제는 이제 일부 국가와 정부가 아닌 글로벌 기업이 주도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공급망 전반에서 갑의 위치에 있는 글로벌 기업들은 협력사 전반에 ESG 경영을 요구하고 있고, 그들의 주도로 지속가능경영 체계로 재편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 규제보다 오히려 글로벌 고객사의 요구가 더 빠르고 직접적인 압력원이 되고 있다는 의미다. 애플, BMW,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기업들이 협력사에 ESG 데이터 제출과 개선 계획 수립을 공식 요건으로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ESG 조직 성숙도 자가 진단: 지금 우리 조직은 어디에 있는가
ESG 조직의 현 위치를 점검하는 4단계 성숙도 모델이다. 솔직한 자가 진단이 출발점이다.
Level 1 — 형식 완비 단계
ESG 전담 인력 또는 팀이 존재하고, 연간 지속가능성 보고서를 발간하며, 대외용 ESG 목표가 수립돼 있다. 그러나 내부 의사결정에 ESG 기준이 반영되지 않고, 데이터는 외부 컨설턴트에 의존하며, 현업 부서와의 협력 채널이 없다.
Level 2 — 데이터 기반 단계
온실가스 배출량(Scope 1·2)을 자체적으로 측정하고, ESG 데이터 관리 체계(플랫폼 또는 내부 프로세스)가 구축돼 있다. 현업 부서별 ESG 담당 역할이 지정되고, 공급망 협력사에 기초적인 ESG 정보 요청이 시작됐다.
Level 3 — 경영 통합 단계
CSO 또는 동급 임원이 이사회·경영진 회의에 참여하고, 임원 보상에 ESG KPI가 연동된다. Scope 3(공급망 포함) 배출량 관리가 이뤄지고, 제3자 검증이 정례화됐다. ESG 목표가 사업 전략 수립에 반영된다.
Level 4 — 전략 선도 단계
ESG가 신규 사업 기회 발굴과 직접 연결되며, 협력사 ESG 역량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SBTi(과학기반감축목표)를 설정하고 단계별 이행 로드맵이 가동 중이다. ESG가 투자 유치, 글로벌 파트너십, 인재 확보의 경쟁 우위 요소로 기능한다.
THE CSR, 대한상공회의소 등 여러 설문과 포럼 결과를 보면, 국내 중견기업 상당수가 아직 ESG 조직·데이터 측면에서 초·중기 단계(Level 1~2)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과 연결된 기업들은, 2026년의 규제 환경을 고려할 때 최소한 데이터 기반 체계(Level 2)를 갖추고 경영 통합 단계(Level 3)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평가가 많다.
결론: ESG 조직의 성패는 '설계'가 아니라 '작동'에 달려 있다
기후 변화, 디지털 전환, 그리고 순환 경제와 같은 구조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ESG는 기업이 직면한 리스크를 식별하고 대응 역량을 점검하는 핵심 프레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문장은 이제 당위가 아니라 현실이다.
글로벌 평가기관, 투자자, 규제 당국, 글로벌 고객사 모두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조직도에 ESG팀을 넣는 것, 멋진 지속가능성 보고서를 발간하는 것, 탄소중립 목표를 선언하는 것 — 이것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 조직에서 ESG 데이터가 실제로 흐르고 있는가. ESG 기준이 실제 사업 결정에 개입하고 있는가. ESG 실패에 대해 누군가 책임을 지는 구조인가.
여러 리포트와 포럼에서는 2026년을, 규제 대응 중심에서 실행 중심 ESG로 전환하는 분수령으로 보고 있다. 전환점은 기회이기도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기업에게는 위기이기도 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화려한 조직도가 아니다. 데이터가 흐르고, 결정이 내려지고, 책임이 귀속되는 ESG 조직. 그것이 2026년이 기업에게 요구하는 최소 기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