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요금 고지서와 에너지 비용 분석 자료가 쌓인 국내 제조업 현장 사무실. [사진 = 코리아비즈니스리뷰 DB]
계시별 요금제 전면 시행을 앞두고 기업들은 조업 스케줄 재설계와 비용 구조 점검에 나서고 있다.
정책 전환의 배경: 왜 지금인가
기후에너지환경부와 한국전력공사는 오는 16일부터 '계절·시간대별 전기요금 개편안'을 본격 시행한다고 14일 공식 발표했다.
겉보기엔 단순한 요금 구간 조정처럼 보이지만, 이 조치의 실질적 의미는 훨씬 크다. 이는 1977년 계시별 요금제가 도입된 이후 49년 만의 대대적 개편 으로, 한국 산업계 전반의 에너지 사용 패턴과 비용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할 신호탄이다.
기존 전기요금 체계는 반세기 전의 산업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낮에는 공장 가동률이 높아 전력 수요가 집중되므로 높은 요금을 부과하고, 수요가 줄어드는 심야에는 저렴한 요금을 적용해 수요를 분산시키는 구조였다. 그러나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보급이 빠르게 확대되면서 이 공식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기 시작했다. 낮 시간 태양광 발전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전력이 남아도는 반면, 일몰 후 수요 피크 구간에서는 고비용의 LNG(액화천연가스) 발전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왜곡 현상이 구조화된 것이다.
정부는 낮 시간대 태양광 발전 전력을 적극 활용하고, 저녁 시간대 LNG 발전 의존도를 줄여 에너지 비용 절감과 공급 안정성 확보를 기대하고 있다.
여기에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라는 외생 변수까지 겹쳤다. 정부는 특히 이번 조치가 중동 전쟁 장기화에 따른 에너지 수급 불안 대응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낮에 남아도는 재생에너지 전력을 최대한 활용해 LNG 수입 의존도를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개편의 핵심 구조: 무엇이 어떻게 바뀌나
이번 개편의 골격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평일 낮 요금 인하다.
기존 평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적용되던 최고요금(최대부하)이 중간요금으로 한 단계 낮아진다. 최대부하 시간대 요금은 kWh당 평균 15.4원 내리는 내용이 담겼다. 가장 큰 할인율이 적용되는 낮 시간대에는 최대부하 구간 기준 약 10% 수준의 요금 인하가 예상된다.
둘째, 저녁 피크 요금 인상이다.
대신 오후 6시부터 9시 구간이 최고요금으로 상향된다. 이는 일몰 후 LNG 발전 의존도가 높아지는 시간대에 가격 신호를 통해 수요 억제를 유도하겠다는 의도다.
셋째, 주말·공휴일 낮 시간 반값 혜택이다.
봄·가을 주말 낮에는 전력량요금을 50% 낮추는 내용이 담겼다. 봄·가을철 전력량요금이 중간부하 97.2원, 최대부하 102.1원 수준인데, 개편안이 시행되면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에는 요금이 절반만 부과된다.
적용 대상과 범위도 단계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우선적으로 개편 요금이 시행되는 '산업용(을)'은 계약전력 300kW 이상 대규모 사업체로, 우리나라 전체 전력소비량의 46%를 차지한다. 유예 신청 사업장 514곳(전체의 1.3%)을 제외한 전체 사업장에 16일부터 적용된다. 정부는 6월 1일부터 산업용(갑)Ⅱ, 일반용(갑)Ⅱ·(을), 교육용(을) 등으로 계시별 요금제를 확대 적용할 계획 이며, 주택용 요금체계에 대한 전환도 중장기 과제로 검토 중이다.
전기차 충전 영역도 이번 개편의 수혜 대상이다. 오는 18일부터 봄·가을 주말 낮 시간대에 충전요금이 50% 할인되며, 자가용 충전기 약 9만4000개소와 공공 급속충전기 약 1만3000기에서 즉시 적용되고, kWh당 최대 40~48원 수준의 할인 효과가 발생한다.
산업계 반응: 업종별 명암이 극명하게 갈린다
정부는 이번 개편이 대다수 기업에게 이로울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산업 현장의 반응은 업종 특성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정부는 이번 개편으로 산업계 전력 수요가 점진적으로 낮 시간대로 이동할 것으로 보고 있으며, 산업용(을) 전체 기준으로는 평균 약 1.7원/kWh 수준의 요금 인하 효과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수혜 여부는 해당 기업이 낮과 밤 중 어느 시간대에 전력을 더 많이 사용하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24시간 공정 특성상 시간대 조정에 따른 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공장이 상시 가동되는 구조라 낮과 밤 요금이 일부 바뀌더라도 실질적인 비용 차이는 제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제철소 등 대규모 연속 공정 업종도 사정은 유사하다.
반면 낮 시간 주로 가동하는 일반 제조업과 식품 가공업, 경공업 분야는 상대적으로 큰 혜택을 볼 가능성이 높다. 가전·IT 제조업은 전력비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아 직접적인 수혜는 크지 않지만 전반적인 방향성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전력을 야간에 집중 사용해 온 전기로(電氣爐) 기반 철강업계는 우려를 감추지 않는다. 반면 전력 사용량이 큰 제강업계에서는 기존 야간 중심 가동에서 낮 시간대로 일부 조정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것으로 보이나, 전체 비용 측면에서는 큰 차이를 만들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전기차 충전 인프라 업계도 부분적인 역효과를 우려한다. 우승훈 국민대 자동차공학과 교수는 "전기차 충전은 주로 심야 시간대에 이뤄지는데, 경부하 요금이 오르면 오히려 비용 부담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514곳의 유예 신청 현황도 시사적이다. 업종별로는 식료품 60개소, 1차금속 55개소, 비금속광물 49개소 순으로 유예 신청이 이뤄졌으나, 특정 업종에 집중되기보다는 개별 기업의 전력 소비 상황에 따라 판단이 이뤄진 것으로 해석된다.
지역별 요금제: 예고된 다음 변수
이번 계시별 요금제 개편이 첫 번째 도미노라면, 두 번째 도미노는 연내 도입이 예고된 지역별 차등 요금제다. 계시별 요금제와 함께 올해 안에 지역별 요금제도 도입된다. 송·배전 비용을 요금에 반영해 전기 생산지에서 가까울수록 요금이 저렴해지는 방향이다.
그 파급력은 상당하다. 김성환 기후부 장관은 지난 2월 국무회의에서 지역별 요금제를 도입할 경우 수도권과 지방의 요금 격차가 kWh당 10~20원 정도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수도권 기업이 지방으로 이전하면 약 10% 정도 요금 절감 효과가 발생하는 셈이다.
이는 단순한 요금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국내 제조업 입지 전략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조적 변화다. 분산에너지 특구(부산·전남·제주·경기 의왕·경북 포항·울산·충남 서산)를 주목해야 하는데, 한전을 거치지 않고 발전소와 전기를 직접 거래하는 방식도 함께 검토되고 있어, 중장기적으로 기업 입지 결정에 에너지 비용이 핵심 변수로 부상할 전망이다.
배출권거래제 4기: 또 다른 비용 파고
전기요금 개편과 맞물려 올해부터 시행되는 배출권거래제 4차 계획기간(2026~2030년)도 산업계의 에너지 원가 구조를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4차 계획기간에는 발전 부문의 유상 할당 비율이 2026년 15%를 시작으로 2027년 20%, 2028년 30%, 2029년 40%, 2030년 50%로 단계적으로 상향된다. 5개 발전 공기업은 2026년부터 2030년까지 배출권 구매에만 약 13조 9,900억 원을 부담해야 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전기요금에 포함된 기후환경요금은 2021년 kWh당 5.3원에서 2025년 9.0원으로 약 70% 인상된 상황이며, 유상 할당 비율이 높아질수록 이 비용은 더욱 가파르게 오를 가능성이 있다.
계시별 요금제 개편을 통한 단기 절감 효과가 배출권 비용 상승에 의해 상쇄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정부는 시장안정화 예비분 제도 도입과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를 통해 배출권 가격 급등을 방지하겠다는 입장이나, 불확실성은 여전히 크다.
불공정무역 조사 시행령 개정: 통상 대응 인프라도 강화
산업부는 같은 날인 4월 14일, 에너지 가격 정책과 별개의 통상 정책 영역에서도 중요한 입법 조치를 예고했다. 법제처는 '불공정무역행위 조사 및 산업피해구제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령안'을 2026년 4월 14일 자로 입법예고했다.
이 조치는 지금의 통상 환경에서 갖는 의미가 남다르다. 미국의 상호관세 정책으로 대변되는 보호무역주의 흐름이 심화되는 가운데, 한국이 불공정무역 피해에 대응하는 국내 법적 인프라를 정비한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반덤핑, 세이프가드 등 산업피해구제 메커니즘의 운영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의 개정이 될 것으로 예상되며, 수입 급증이나 불공정 경쟁에 노출된 국내 제조업종에 실질적인 보호막이 될 수 있다.
산업통상부는 또한 '산업 디지털 전환 촉진법 시행규칙 및 시행령 일부개정령안'을 4월 10일 입법예고한 데 이어,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및 탄소중립 전환을 위한 특별법 시행령·시행규칙 제정안도 4월 1일 예고한 바 있다. 에너지·산업 정책의 법적 기반을 동시다발적으로 정비하는 양상이다.
3월 ICT 수출 사상 최초 400억 달러 돌파
이러한 정책 변화의 배경에는 한국 수출의 구조적 호조라는 맥락이 자리하고 있다. 반도체가 날개를 달면서 3월 ICT 수출이 사상 처음으로 400억 달러를 돌파했다. 2026년 한국 경제는 반도체 수출 호조세와 소비 회복세로 2025년 1.0%보다 높은 1.9% 정도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수출 실적의 이면에는 구조적 취약성이 병존한다. 미국 관세 인상의 영향으로 對미국 수출이 부진하였으나 반도체 수출이 급증하면서 미국 이외 국가로의 수출은 확대 되는 국가별 편차가 뚜렷하다.
반도체라는 단일 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심화되는 수출 구조의 취약성, 미국 반도체 관세 불확실성, 중국발 경쟁 압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환경에서 이번 에너지 가격 정책 개편은 제조업 경쟁력을 에너지 비용 차원에서 지원하려는 의도도 내포하고 있다.
KBR INSIGHT: 기업이 지금 움직여야 할 세 가지 이유
① 시간이 곧 돈이다 — 조업 스케줄 재설계 타이밍
이번 개편의 본질은 '전기요금의 시간 가격화'다. 낮 11~15시 최대부하 요금이 중간부하로 전환되는 것은 사실상 기업의 낮 시간 생산 활동에 대한 보조금 성격을 갖는다. 낮 시간 생산 비중을 높일 수 있는 업종—식품, 경공업, 조립 제조 등—은 즉각적인 수혜가 가능하다. 조업 스케줄 재검토와 에너지 관리 시스템(EMS) 도입 검토가 시급한 이유다.
② 지역별 요금제 — 입지 전략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하반기 도입이 예고된 지역별 전기요금제는 그간 수도권 중심으로 고착화됐던 산업 입지 전략에 근본적 변화를 요구한다. 분산에너지 특구 지정 지역(전남, 포항, 울산, 서산 등)의 에너지 비용 경쟁력은 단순 임금·지가 비교를 넘어 입지 결정의 핵심 요인이 될 것이다. 신규 공장이나 데이터센터 입지를 검토 중인 기업이라면 지금이 의사결정 시기다.
③ 탄소 비용 상승의 현실적 시나리오를 대비하라
배출권거래제 4기 유상 할당 비율이 단계적으로 확대되면서 전력 원가에 반영되는 탄소 비용은 구조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RE100 이행 및 자가소비형 태양광 설치는 단순한 ESG 이미지 전략이 아니라, 실질적인 에너지 비용 헷지 수단으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정부의 건물지원사업 보조금과 온사이트 PPA 제도를 병행 활용하면 초기 투자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한국의 에너지 가격 체계는 지금 반세기 만의 전환 구간에 진입했다.
이 전환은 단순한 요금표 변경이 아니라,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재편되는 전력 시스템의 비용 구조를 시장 가격 신호를 통해 산업계 전체에 전달하는 구조적 혁신이다.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 간의 비용 격차는, 앞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벌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