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적인 ESG 성과 지표(KPI)의 장벽을 뚫고, 실질적인 지속가능경영의 미래를 여는 거버넌스의 중요성을 상징하고 있다.
진정한 ESG는 단순한 수치 달성이 아닌 본질적인 변화에서 시작된다. [이미지 = 코리아비즈니스리뷰 DB]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ESG(환경·사회·거버넌스) 경영이 필수적인 생존 조건으로 자리 잡으면서, 기업들은 앞다투어 ESG 성과를 측정하고 관리하기 위한 핵심성과지표(KPI)를 도입했다. 경영진의 보상을 ESG 성과와 연동하는 기업도 급증하는 추세다.
수치화된 목표는 조직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감지되고 있다.
조직을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 ESG KPI가 오히려 리스크를 은폐하고, 본질적인 변화를 가로막는 ‘왜곡의 도구’로 전락하는 역설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Charles Goodhart)는 "어떤 평가지표가 목표가 되는 순간, 그 지표는 더 이상 좋은 평가지표가 될 수 없다"고 통찰했다. 이른바 '굿하트의 법칙'이다. 이 법칙은 현재 기업의 ESG 경영 현장에서 뼈아픈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수치 달성 자체가 목적이 되면서, 기업들은 실질적인 환경·사회적 영향(Impact)을 개선하기보다 지표를 '마사지'하는 데 경영 자원을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겉으로는 목표를 달성한 것처럼 초록색(Green)을 띠지만, 속은 위험으로 붉게(Red) 곪아있는 이른바 '수박(Watermelon) KPI' 현상이다.
탄소 감축 지표의 착시: 외주화된 배출량과 스코프 3의 역습
가장 대표적인 왜곡은 환경(E) 영역, 특히 온실가스 감축 목표에서 나타난다.
많은 기업이 탄소 중립(Net-Zero)을 선언하고 사업장 내 직접 배출량(Scope 1)과 간접 배출량(Scope 2)을 줄이기 위한 KPI를 설정했다.
그러나 일부 기업은 혁신적인 공정 개선이나 재생에너지 전환 대신, 배출 집약적인 공정을 협력사로 외주화하거나 자산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지표를 달성한다.
이는 개별 기업의 KPI 화면에서는 '성공적인 감축'으로 표시되지만, 지구 전체의 탄소 배출량이나 글로벌 공급망 관점에서는 아무런 실질적 감소가 일어나지 않은 전형적인 '착시'다.
이러한 수치적 꼼수는 점차 글로벌 공시 규제의 그물망에 걸려들고 있다.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가 확정한 'IFRS S2 기후 관련 공시' 기준은 가치사슬 전반에서 발생하는 총 온실가스 배출량인 스코프 3(Scope 3) 공시를 의무화하고 있다.
스코프 1과 2 지표만 관리하며 성과를 부풀리던 기업들은 이제 공급망 전체의 배출 데이터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는 압박에 직면했다. 지표의 범위를 좁혀 성과를 과장하던 기존의 KPI 설정 방식은 더 이상 투자자와 규제 당국을 설득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산업안전 KPI의 치명적 함정: 은폐를 조장하는 '무재해' 목표
사회(S) 영역에서 KPI의 왜곡은 생명과 직결되는 산업안전보건 분야에서 가장 심각하게 드러난다.
다수의 기업이 ‘재해율(LTIFR 등) 감소’ 또는 ‘무재해 일수 달성’을 핵심 KPI로 삼고, 이를 현장 관리자의 인사 고과나 성과급에 직결시킨다. 겉보기에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훌륭한 제도 같지만, 조직 행동 관점에서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는다.
사고가 발생하면 부서의 성과급이 깎이는 구조 속에서, 현장 관리자와 노동자들은 경미한 부상이나 아차사고(Near-miss)를 보고하지 않고 은폐하려는 강력한 유인을 갖게 된다.
결과적으로 서류상의 재해율 지표는 완벽에 가깝게 유지되지만, 경영진은 현장에 잠재된 실제 위험 요소를 파악할 기회를 잃는다. 작은 징후들이 무시되고 은폐된 결과는 결국 중대재해라는 파국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국제노동기구(ILO) 가이드라인과 ISO 45001 등 글로벌 안전보건 경영시스템은 이러한 이유로 '후행 지표(Lagging Indicator)' 중심의 성과 측정을 경계한다. 대신 안전 교육 이수율, 위험성 평가 개선 조치 완료율, 아차사고 자발적 보고 건수 등 재해를 예방하는 과정 자체를 측정하는 '선행 지표(Leading Indicator)'의 비중을 높일 것을 권고한다.
"안전 사고가 몇 건 났는가"를 묻는 KPI에서 "안전을 위해 무엇을 선제적으로 조치했는가"를 묻는 KPI로의 전환이 필수적인 이유다.
이사회 다양성의 형식화: 할당제가 가린 의사결정의 질
거버넌스(G) 영역 역시 단순 수치화의 함정에서 자유롭지 않다.
최근 몇 년간 글로벌 투자자들의 요구와 각국의 법적 규제에 따라 이사회 내 여성 이사 비율을 높이는 기업이 급증했다. 수치상으로는 다양성 지표가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단순히 외부 평가 기관의 점수를 잘 받거나 규제를 회피하기 위해 전문성과 이사회 내 역할 조율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숫자 채우기' 식으로 이사를 선임한 경우, 의사결정의 실질적인 질적 향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다양성 KPI의 본질은 성별이나 인종의 비율을 맞추는 것을 넘어, 특정 집단사고(Groupthink)에 빠지지 않고 다양한 관점에서 리스크를 통제하고 기회를 발굴하는 '인지적 다양성(Cognitive Diversity)'을 확보하는 데 있다.
포용적인 문화가 동반되지 않은 채 수치적 목표만 달성한 다양성 KPI는 거버넌스의 본질적 개선을 위장하는 또 다른 형태의 표면적 지표에 불과하다.
공시 규제의 진화: '보여주기식 지표'에서 '이중 중대성'으로
글로벌 규제 당국과 표준 제정 기구들은 기업들의 이러한 지표 왜곡 현상을 정확히 인지하고, 제도적 보완책을 내놓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유럽연합(EU)의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과 그에 따른 공시기준인 ESRS다. 이 기준의 핵심은 '이중 중대성(Double Materiality)' 평가다.
과거에는 기업이 자사에게 유리하거나 관리하기 쉬운 지표를 자의적으로 선택해 공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중 중대성 개념이 도입되면서, 기업은 환경·사회적 요인이 기업의 재무 상태에 미치는 영향(재무적 중대성)과 기업의 경영 활동이 외부 환경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영향 중대성)을 양방향으로 평가해야 한다.
단순히 KPI 달성 여부를 보고하는 것을 넘어, 그 지표가 왜 기업과 사회에 중대한지, 목표 미달성 시 어떤 재무적 리스크가 발생하는지, 목표 달성을 위한 자원 배분 계획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성과 지표의 맥락과 투입 과정을 투명하게 밝히도록 강제함으로써, 수치만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워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의도다.
실무 인사이트: 왜곡을 막기 위한 거버넌스 재구축
그렇다면 기업은 ESG KPI가 조직을 왜곡하는 현상을 어떻게 방지해야 할까.
이는 실무 부서만의 과제가 아니라 전사적 통제 구조, 즉 이사회 중심의 거버넌스 혁신이 필요한 영역이다. 확인된 국제 기준과 앞서가는 기업들의 대응 사례를 종합하면, 다음의 세 가지 실행 포인트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평가지표의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해야 한다.
최종 결과만을 측정하는 후행 지표에 대한 보상 연동 비중을 줄이고, 프로세스와 행동 변화를 유도하는 선행 지표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단순히 '탄소 배출량 감소'를 KPI로 두는 대신, '사내 탄소 가격제 적용 결재 비율'이나 '친환경 공급망 실사 완료율'을 지표로 삼아 실질적인 내부 프로세스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둘째, 데이터 정합성과 내부통제를 강화해야 한다.
재무 데이터에 엄격한 회계 감사가 적용되듯, 비재무적 ESG 데이터 역시 생성, 취합, 보고되는 전 과정에서 내부통제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
담당자의 수기 입력에 의존하거나 부서 이기주의에 의해 데이터가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과 연동된 ESG 데이터 플랫폼 구축이 요구된다. IFRS S1 기준 역시 기후 및 지속가능성 관련 위험을 내부통제 및 리스크 관리 체계에 통합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셋째, 이사회의 실질적 감시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이사회 내 ESG 위원회는 경영진이 제시한 KPI의 '달성률'만 보고받고 박수 치는 거수기 역할을 벗어나야 한다.
해당 지표가 기업의 장기적인 가치 창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목표 달성을 위해 무리한 단기 의사결정이나 부작용이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지표 설정의 '타당성' 자체를 끈질기게 질문하고 검증해야 한다.
결론: 지표는 나침반일 뿐, 목적지가 아니다
기업 경영에서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관리할 수 없다는 격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ESG KPI는 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필수적인 나침반이다. 그러나 단기적인 보상과 평가를 위해 나침반의 바늘을 억지로 목표 지점에 고정시켜 둔다면, 기업이라는 배는 결국 암초에 부딪히고 만다.
현재 글로벌 자본시장과 규제 환경이 기업에 요구하는 것은 화려하게 포장된 숫자들의 나열이 아니다.
그 숫자가 어떤 고민의 산물인지,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투명한 서사다. 기업 실무진과 이사회는 현재 설정된 ESG KPI가 조직의 긍정적 변화를 촉진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면의 리스크를 은폐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점검해야 한다.
성과 지표가 조직의 진실을 왜곡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조율하고 감시하는 것, 그것이 현시대 거버넌스의 가장 중요한 책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