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경제 시스템은 역사적으로 자원의 희소성(Scarcity)을 전제로 배분 방식을 결정하고 가치를 산정해 왔다.
그러나 최근 일부 학자와 테크 업계에서는 고도의 자동화와 생성형 인공지능(AI)이 디지털 기반 재화·서비스를 중심으로 생산의 한계비용을 극히 낮은 수준까지 떨어뜨려, 이른바 ‘초공급(Hyper-Abundance)’ 시나리오를 이론·정책 담론 차원에서 점차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이러한 포스트 희소성 담론은 아직 제한된 커뮤니티에 머무르며, 주류 거시정책 합의와는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분야에서 상품과 서비스의 공급 여력이 크게 확장된 경제 구조를 상정하면, 기존 자본주의의 근본 전제에 대한 선제적인 점검이 요구된다.
우리가 경제 활동의 기본으로 여겨왔던 노동을 통한 소득 창출 경로와 가치 교환의 매개체인 현금의 역할에 점진적이고 구조적인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전망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코리아비즈니스리뷰(KBR) 심층분석에서는, AI가 촉발할 수 있는 새로운 공급 생태계의 가능성과 이에 따른 분배 및 화폐 시스템의 진화 방향을 둘러싼 실증적 논의를 짚어본다.
한계비용 하락 담론과 부문별 디스인플레이션 압력
과거 산업혁명이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기계로 보완하는 과정에 집중했다면, 최근의 AI 기술 혁신은 인지적·지적 영역의 자동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법률 데이터 분석, 디자인 및 콘텐츠 창작 등 고도의 지적 노동이 요구되던 분야에 생성형 AI가 투입되면서 생산성 지표가 새롭게 쓰이고 있는 양상이다.
디지털 환경에서 복제·배포 비용이 미미하기 때문에, 특정 정보·콘텐츠·소프트웨어 재화에 한해 이론적으로는 무상에 가까운 가격으로 매우 큰 규모의 공급이 가능하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한 번 알고리즘과 데이터 인프라가 구축되면 추가적인 서비스 제공에 들어가는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하락하는 디지털 경제 특유의 궤적을 밟고 있는 것이다.
물리적인 실물 경제에서도 에너지·원자재·토지 등 필수 투입요소의 제약을 감안하더라도, 일부 품목에서는 유사한 방향의 비용 절감이 전개될 가능성이 거론된다.
스마트 팩토리의 무인화율이 높아지고 산업용 로보틱스 기술 및 자율주행 물류가 고도화되면, 최종 소비재 생산에 투입되는 인건비와 운송비 비중이 점진적으로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물 재화는 소재의 희소성이라는 명확한 물리적 한계를 지니지만, 공정 효율화를 통한 제한적인 단가 인하 잠재력은 여전히 중요한 연구 주제로 다뤄진다.
결과적으로 경제 전반에 AI가 도입될 경우, 특히 소프트웨어·콘텐츠·백오피스 서비스 등에서 생산성 향상으로 일부 재화·서비스 가격에 ‘기술 디플레이션(Technological Deflation)’에 가까운 디스인플레이션 압력(물가 상승률 둔화)이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이 일부 연구자들 사이에서 제기된다.
이러한 가격 조정이 장기적으로 경제 전반의 활력 저하로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합의가 없으며, 일부에서는 통화·재정 정책 설계 난이도가 높아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는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기술 발전이 가져오는 긍정적 후생 증대와 기업의 수익성 압박이라는 양면적 파급 효과가 교차하고 있는 셈이다.
노동 시장의 고용 조정 가속과 양극화 우려
공급 여력이 확장되는 시나리오 이면에는 노동 시장의 구조적 재편이라는 묵직한 쟁점이 자리 잡고 있다.
고도화된 AI 모델이 복잡한 인지적 업무를 신속하게 처리해 내면서, 화이트칼라 지식 노동자를 포함한 특정 직무와 산업에서는 인간 노동의 상대적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데이터 정리나 단순 번역 등 저숙련·반복 업무 영역에서 고용 조정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 장기적으로 일부 직군에서 구조적 실업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물론 AI가 기존 일자리를 대체하는 동시에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AI 윤리 검수, 데이터 큐레이션 등 새로운 형태의 직무를 만들어내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라지는 일자리와 새로 생겨나는 일자리 사이의 ‘기술적 마찰’ 기간 동안 노동자들이 겪게 될 전환 비용은 상당할 것으로 관측된다. 재교육·전환 지원이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경우, 노동 시장 내 임금·고용 양극화가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도 적지 않다.
이러한 노동 시장의 변화는 ‘고용을 통한 소득 창출과 소비’라는 자본주의 경제의 전통적 선순환 구조에 강한 압력을 가할 수 있다.
노동 수요가 특정 고도 숙련자나 AI 시스템 설계자 등 일부 계층에 상대적으로 더 많이 집중될 경우, 다수 대중의 구매력이 정체되거나 저하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소비할 주체의 안정적인 소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거시 경제의 건전한 성장 생태계가 훼손될 수밖에 없다.
향후 제도 설계 과정에서 소득을 단순한 노동 시간의 대가를 넘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안정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반 측면에서 바라보려는 학계의 논의가 점차 늘어나는 이유다.
대안적 분배 제도의 실증과 한계: 기본소득과 과세 논의
노동 시장의 불확실성을 보완할 대안적 제도로 가장 널리 거론되는 아이디어 중 하나는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 UBI)’이다. 조건 없이 일정한 현금을 지급해 일자리 충격을 완화하자는 취지다.
핀란드 등에서 진행된 제한적 기본소득 실험에서는, 우려와 달리 노동공급이 전면적으로 감소했다는 일관된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연구에서는 특정 취약계층의 노동시간이 다소 줄어든 반면, 전반적인 고용 수준이나 삶의 만족도는 소폭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고한다. 다만 전 국민 상시제도로 확장될 경우의 막대한 재정 부담과 물가 상승 등 거시경제 효과에 대해서는 학계와 정책 현장에서 여전히 의견이 크게 엇갈린다.
분배 재원을 확충하기 위한 조세 제도 개편 논의 역시 활발하다. 여러 나라에서 정치인·학자·싱크탱크를 중심으로 ‘로봇세(Robot Tax)’나 ‘데이터세’ 도입이 제안되고 있으나, 로봇을 포괄적으로 정의해 폭넓게 과세하는 제도가 정착된 국가는 아직 없다.
한국은 지난 2017년 세법 개정을 통해 일부 자동화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을 축소하며 외신 등에서 ‘세계 최초 로봇세’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지만, 이는 로봇 도입 자체에 별도의 징벌적 세금을 부과한 것이라기보다 기존 세제 혜택을 줄인 조정에 가깝다는 평가가 많다.
글로벌 규제 조화 없이 단독으로 과세할 경우 기업의 혁신 동력을 저해하고 자본 이탈을 부추길 수 있다는 반론이 여전히 우세한 상황이다.
최근 테크 커뮤니티 일각에서는 정보 격차 해소를 위해 일정 수준의 컴퓨팅 파워 접근권을 기본권처럼 보장하자는 ‘보편적 기본 연산력(Universal Basic Compute)’ 아이디어도 소개되고 있다.
미래 경제에서 AI 인프라 활용 능력이 곧 부의 창출로 직결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또한 소수 논자들은 전력·연산력 같은 물리적·디지털 자원을 화폐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실험적 모델을 제안하지만, 아직은 정책적 구체성을 띠지 못한 개념적 제안에 가까운 주변적 논의로 평가된다.
화폐 인프라의 점진적 진화: CBDC와 실험적 대안들
분배 방식의 담론이 다변화되는 가운데, 가치를 교환하고 저장하는 화폐의 결제 인프라 역시 근본적인 전환기를 거치고 있다.
모바일 뱅킹과 간편 결제 비중이 급증하면서 실물 현금 사용이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가운데, 공공 부문에서는 이를 대체할 통화 시스템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의 2024년 설문에 따르면, 조사 대상 93개 중앙은행 중 약 91%가 소매형·도매형을 포함해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를 어떤 형태로든 연구·실험 중이라고 답했다.
통화 당국이 직접 관리하는 CBDC는 거래 비용을 낮추고 금융 포용성을 높이는 장점을 지니지만, 프라이버시 침해나 국가 감시 강화 우려 등 짚고 넘어가야 할 거버넌스 쟁점도 적지 않다. 특히 최근에는 디지털 통화에 스마트 계약(Smart Contract) 기술을 결합하는 방식이 주목받고 있다.
일부 중앙은행과 민간 컨소시엄은 CBDC에 특정 조건에서만 결제가 실행되거나 기한을 설정할 수 있는 ‘프로그래머블 페이먼트(Programmable Payment) 및 프로그래머블 머니’ 기능을 소규모 파일럿으로 시험하고 있지만, 아직 광범위한 상용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 기술이 성숙하면 재정 지원금의 사용처를 정밀하게 통제하는 등 정책 집행의 효율성을 높일 잠재력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아울러 사물인터넷(IoT) 기기와 AI 에이전트 간 데이터 교환이 일상화될 미래를 대비해, 디지털 화폐를 활용한 기계 간(M2M) 초소액 결제 모델을 모색하는 초기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사람의 개입 없이 자율주행차가 통행료를 스스로 정산하거나 스마트 가전이 최적의 타이밍에 전력을 구매하는 식의 거래 생태계가 조성될 수 있다는 전망에 기반한 시도들이다.
KBR Insight
본문에서 짚어본 바와 같이, 고도화된 AI는 특정 디지털 재화와 서비스를 중심으로 생산의 한계비용을 낮추며 경제 시스템 내 새로운 변화의 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노동 시장의 전환 비용 증가와 디지털 화폐 도입 움직임 등은 기존 희소성 기반 경제 법칙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새로운 불균형을 예고한다. 동시에, 희소성이 완전히 해소되기보다는 분야별·계층별로 고성능 연산 인프라나 양질의 데이터 등 새로운 형태의 희소성이 재구성될 것이라는 반론도 적지 않다.
이러한 논의들은 AI·자동화 시대에 어떤 분배·통화 시스템이 적합한지에 대한 ‘탐색적 실험’ 단계에 머물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지속적인 정책적 검증이 요구된다.
결론 : 새로운 경제 질서를 향한 이행: 기술 고도화를 뒷받침할 제도적 기반 구축이 관건
디지털 재화와 AI 기술을 중심으로 촉발된 초공급 담론과 이에 파생되는 여러 경제적 쟁점들은 현행 자본주의 분배 시스템의 보완 필요성을 묻고 있다.
이러한 시나리오가 당장의 거시지표를 완전히 뒤바꾼 주류 합의는 아닐지라도, AI와 자동화가 소득 분배 구조와 화폐 시스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문제의식은 폭넓게 공유되고 있다.
일부 산업 부문의 디스인플레이션 압력, 고용 조정 속도의 변화, 기본소득의 제한적 실험, 그리고 전 세계 90% 이상의 중앙은행이 뛰어든 CBDC 연구는 모두 새로운 경제 질서를 향한 이행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특정 분야에서 확인되는 혁신의 성과가 경제 전반의 안정적 성장으로 환원되기 위해서는, 파편화된 기술 도입 논의를 넘어선 포괄적이고 신중한 접근이 필수적이다.
극단적인 낙관론이나 막연한 비관론을 피하고, 현재 축적된 실증 연구와 파일럿 결과를 토대로 고용·세제·통화정책을 점진적으로 보완해 나가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입장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다가오는 시대의 경제적 복원력은 기술의 고도화만이 아니라, 그 기술에 내재된 불확실성을 관리하고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정교한 제도적 기반 마련에 달려 있다.

![AI와 자동화가 이끄는 생산성 혁신은 공급 측 구조를 빠르게 확장시키며, 기존 경제 질서의 수요·공급 균형 원리에 구조적 재조정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 = 코리아비즈니스리뷰 자료 사진]](https://epzvqcvbpcduaglyoici.supabase.co/storage/v1/object/public/news-images/legacy-cgi/2026/03/09/1773020864_36889.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