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B 공시 표준과 EU CSDDD 등 강화되는 국제 규제는 기업 지배구조의 투명성과 전문성을 실증 데이터로 증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법적 책임과 실질적 이행이 결합된 ‘실질적 거버넌스’ 구축이 기업 경쟁력의 핵심이다.
글로벌 경영 환경에서 ESG(환경·사회·거버넌스)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보편적 경영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거버넌스(Governance)는 환경(E)과 사회(S) 리스크를 식별하고 관리하는 핵심 엔진으로서 그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의 공시 기준을 채택했거나 자국 규제 체계에 통합하겠다고 공식 발표한 관할지역은 2025년 중반 기준으로 영국, 캐나다, 일본 등을 포함해 30개 이상으로 집계되며, 추가 관할지역 역시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 중이다.
이와 더불어 EU의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CSDDD)은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 대해 인권·환경 실사 의무를 부과하고 위반 시 행정 제재의 근거를 마련하며 지배구조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기업들에게 단순히 '무엇을 공시할 것인가'를 넘어 '어떻게 실질적인 리스크 관리 역량을 갖출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1. 글로벌 거버넌스의 핵심 트렌드: '이사회 전문성'과 '보상 체계'의 연계
글로벌 자본시장이 요구하는 거버넌스의 핵심은 이사회의 실질적 통제 기능이다. 블랙록(BlackRock)의 2025년 의결권 행사 가이드라인은 이사회가 회사의 사업모델 내 '중대한 기후 리스크(Material Climate Risk)'를 어떻게 감독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기대치를 제시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리스크 감독이 미흡하다고 판단될 경우, 이사 선임 안건에 반대표를 던질 수 있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이사회의 책임을 강조한다.
투자자들은 이제 이사회가 기후 리스크를 단순 인지하는 수준을 넘어, 경영진의 전환 전략을 검증하고 감독할 역량이 있는지에 주목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 지멘스(Siemens)는 2023/24년 보상 정책에서 장기 인센티브(LTI)의 20% 비중을 'ESG 퍼포먼스 모디파이어(Performance Modifier)'로 설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CO2배출 저감, 인적자원 개발, 고객 만족도(NPS) 등 구체적인 지표를 성과에 반영하며 공급망 전반의 책임 경영을 유도한다.
엑손모빌(ExxonMobil) 역시 2021년 주주 행동주의 펀드 '엔진 No.1' 사태 이후, 에너지 전환과 기후 리스크 관련 전문성을 보유한 이사를 추가 선임하고 이사회 차원에서 저탄소 사업 전략을 감독하는 기능을 강화해왔다.
애플(Apple)은 2024년 발표한 환경 진척 보고서에서 제품 생산 관련 직접 제조 지출의 약 95%를 차지하는 320개 이상의 핵심 공급업체가 2030년까지 100% 재생에너지 사용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약속했다고 밝혔다.
애플은 이러한 공급망 관련 에너지·노동 데이터를 디지털 시스템으로 통합 관리하며 주요 공급업체의 이행 현황을 정기적으로 공개함으로써, 거버넌스의 통제 범위를 공급망 하단부까지 확장하여 비즈니스 연속성을 확보하고 있다.
2. 한국형 거버넌스의 현주소: 형식적 운영과 인적 구성의 격차
한국 기업들 역시 외형적인 성장을 이뤘으나, 실질적 운용 지표에서는 글로벌 스탠다드와 격차를 보인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국내 평가기관 자료에 따르면, 상위 대기업들의 ESG 위원회 안건 통과율은 대체로 매우 높은 수준으로 나타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위원회 심의가 경영진 결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보다는 보고 및 추인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글로벌 ESG 표준과 한국형 ESG 현황을 비교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격차가 관찰된다.
우선 이사회 전문성 측면에서 ISSB 공시는 이사회가 기후 및 전환 리스크를 어떻게 감독하는지에 대한 정보 공개를 요구하며, CSDDD는 실사 및 거버넌스 책임을 이사회와 경영진에 명시적으로 연결한다.
반면 국내 상장사 이사회는 여전히 학계 및 관료 출신 사외이사 비중이 높고, 기후·인권·공급망 등 ESG 핵심 분야의 직접적인 실무 경험을 가진 이사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다는 평가가 많다.
공급망 거버넌스 영역에서도 격차는 뚜렷하다. 글로벌 지침이 하위 협력사까지 적절한 실사를 수행하고 시정 조치를 공시할 것을 요구하는 데 반해, 국내 주요 기업의 공급망 관리는 주로 1차 협력사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2차 이하 협력사에 대한 체계적인 데이터 수집 및 실무 지원 시스템은 아직 구축 단계에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평가기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보상 체계 역시 글로벌 기업들과 달리, 국내 주요 기업들의 경영진 보수에서 ESG KPI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전체 변동 보수의 작은 비율에 머무는 경우가 많아 실질적인 유인 구조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3. 규제 환경 변화와 실무적 도전 과제: CSDDD와 ISSB의 파급력
공급망 관리는 이제 평판 리스크를 넘어 규제 및 소송 리스크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EU CSDDD는 입법 초기 논의 단계에서 전 세계 순매출의 최대 5%까지 과징금 상한을 두는 안이 거론되었으나, 2025년 초 EU 의회와 이사회 간 정치적 합의(Political Agreement)에서는 회원국이 기업에 부과할 수 있는 과징금 상한을 해당 기업 전 세계 순매출의 최대 3%로 설정했다. 이는 수출 비중이 높은 국내 자동차, 배터리, 전자 산업 기업들에게 실질적인 재무적 리스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현장의 실무자들은 하위 협력사의 데이터 비협조를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는다. 그러나 글로벌 스탠다드는 중대한 리스크에 대한 합리적인 실사와 공시를 엄격히 요구한다.
따라서 원청 기업이 공급망 관리 시스템을 디지털화하고 협력사의 리스크 관리 역량을 지원하는 상생형 거버넌스로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데이터의 정합성을 확보하는 거버넌스 체계가 갖춰질 때 비로소 '그린워싱' 논란을 방지하고 글로벌 시장에서의 신뢰를 유지할 수 있다.
4. 거버넌스 고도화를 위한 심층 실행 전략 (Action Plan)
기업 실무자가 현장에 적용하고 이사회에 제안해야 할 핵심 전략은 다음과 같다.
① 이사회 역량 구성표(BSM)의 도입과 고도화
단순히 사외이사의 경력을 나열하는 방식을 벗어나, 기업이 직면한 핵심 리스크와 이사회의 전문성을 매칭한 BSM을 작성해야 한다. 일부 해외 리포트에서는 BSM을 구체적으로 공시하는 기업이 투자자와의 신뢰 형성에 도움이 된다고 평가된다. 예를 들어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의 영향을 받는 기업이라면 이사회 내에 에너지 전환이나 글로벌 규제 전문가가 포함되어 있음을 가시화해야 한다.
② ESG 성과와 경영진 보수 체계의 실질적 연계
ESG 지표를 핵심성과지표(KPI)에 산입하고, 변동 보수와 연동되는 비중을 단계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여러 글로벌 리서치와 투자자 대화에서는 3~5년 단위의 장기 인센티브(LTI)에 ESG 목표를 통합하는 방식이 단기 실적 왜곡을 줄이고 거버넌스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방안으로 거론된다.
③ 전사적 리스크 관리(ERM) 체계와의 통합
ESG 리스크를 별도의 아젠다로 취급하지 말고, 재무 및 전략 리스크 관리 체계 내로 통합해야 한다. 기후 위기나 공급망 단절이 재무제표에 미칠 잠재적 영향을 시뮬레이션하고 이를 이사회에 상시 보고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는 이사회가 ESG를 비용이 아닌 리스크 통제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핵심적인 변화다.
④ 내부신고제도의 독립성 및 실효성 확보
글로벌 가이드라인 및 모범 사례에서는 신고자의 익명성뿐만 아니라 조사 과정의 독립성을 엄격히 평가한다. 내부 제보 내용이 경영진의 간섭 없이 감사위원회나 사외이사에게 직접 보고되는 직통 채널(Hotline)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공급망 내 협력사 직원들도 접근 가능한 신고 창구를 마련하는 것이 글로벌 인권 실사 대응의 핵심으로 간주된다.
5. 거버넌스 개선을 위한 단계적 로드맵 제시
한국 기업이 글로벌 수준의 거버넌스를 갖추기 위해서는 단기적으로는 공시 역량 강화에 집중하되, 장기적으로는 이사회의 인적 구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1단계: 기반 구축(1~2년)]
현재 운영 중인 ESG 위원회의 안건 분석을 통해 위원회가 경영진에게 실질적인 피드백을 제공하고 있는지 자가 점검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BSM을 명문화하고 현재 이사회의 역량 공백(Gap)이 어디에 있는지를 대외적으로 인정하고 개선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2단계: 체계 내재화(3~5년)]
이사 후보 추천 과정에서 성별, 국적뿐만 아니라 특정 분야(기후, 인권, 디지털 등)의 전문성을 균형 있게 갖춘 후보자군(Pool)을 상시 관리해야 한다. 공급망 리스크 관리 체계 또한 단순 설문 조사를 넘어 실질적인 데이터 검증과 실무 지원이 결합된 형태로 진화해야 글로벌 규제 문턱을 넘을 수 있다.
6. 실무자를 위한 제언: 거버넌스는 관점의 문제다
거버넌스의 성공은 제도의 도입만큼이나 실효적인 운영에 달려 있다. 아무리 훌륭한 BSM과 성과 연동 보수 체계를 갖추었더라도, 이사회 내에서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적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실질적인 거버넌스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실무자들은 이사회가 경영진으로부터 독립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안건이 충분한 시간을 두고 사전 검토될 수 있도록 프로세스를 혁신해야 한다. 한국 기업과 글로벌 기업의 차이는 ESG를 외부 규제 준수로 볼 것인지, 아니면 내부 의사결정 품질 제고 수단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관점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결론]
국제 공시 기준(ISSB 등)과 EU 규제(CSRD, CSDDD 등)의 본격적인 시행으로, 기업의 ESG는 선언 중심에서 데이터와 검증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이동하고 있다.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이고 이사회의 인적 구성을 다변화하며, 공급망 전체를 아우르는 책임 경영을 실현하는 것만이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이다.
2025~2026년은 이러한 변화가 실제로 기업의 펀더멘털 강화와 장기 가치 제고로 이어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거버넌스는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최상위 전략이다.
실무자들은 거버넌스 고도화가 기업의 신뢰도를 높이는 핵심 동력임을 인식하고, 전사적인 변화를 주도하는 리더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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