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대중화의 장벽인 높은 가격과 인프라 부족이라는 '죽음의 계곡'을 건너는 글로벌 완성차 산업의 위기와 도전. [이미지 = 코리아비즈니스리뷰 자료 이미지]
혁신적인 신기술이 대중화 단계로 넘어가기 전, 초기 수용자 층을 지나 일시적으로 수요가 정체되거나 후퇴하는 현상을 경제학에서는 캐즘(Chasm)이라 정의한다.
최근 글로벌 전기차(EV) 산업은 단기적으로 성장 둔화 압력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구간에 들어섰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2020년대 초반까지 두 자릿수 후반에서 세 자릿수에 달하는 폭발적 성장을 이어오던 시장이, 이제는 인프라 부족과 높은 초기 구매 비용이라는 현실적 장벽에 부딪히며 ‘속도 조절’에 들어간 모습이다.
대중 소비자들은 더 이상 기술적 신비로움만으로 지갑을 열지 않으며, 실질적인 경제성과 편리함이 담보될 때까지 구매를 유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본 기사에서는 2026년 현재 시점의 최신 통계 데이터를 바탕으로 캐즘의 현주소와 대응 과제를 정밀 분석한다.
기술 수용 주기의 거대한 틈새, 캐즘의 정의와 발생 배경
캐즘은 미국 마케팅 전문가 제프리 무어(Geoffrey Moore)가 1991년 제시한 개념으로, 지질학적으로 ‘지각 변동으로 인한 거대한 틈’을 뜻한다.
비즈니스 관점에서는 신기술에 열광하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s)'와 실무적 가치를 중시하는 '초기 다수파(Early Majority)' 사이의 심리적·경제적 단절을 의미한다. 여러 시장조사기관과 업계 전문가들은 현재 전기차 시장의 성장 둔화를, 기술 수용 주기상 전형적인 ‘캐즘’ 구간에 진입한 현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많다.
이러한 캐즘 현상의 배경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존재한다. 초기 수용자들은 환경 보호나 혁신 기술 체험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했으나, 대중 소비자들은 충전 스테이션의 부족, 긴 충전 시간, 내연기관차 대비 높은 판매 가격 등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특히 유럽 일부 국가에서의 보조금 축소 및 조기 종료와 고금리 기조는 전기차의 총소유비용(TCO) 경쟁력을 떨어뜨리며 소비자 구매 심리를 위축시키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글로벌 및 국내 통계로 본 시장의 ‘속도 조정’ 현황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2023년 글로벌 전기차 판매는 전년 대비 약 33.5% 증가했으나, 2024년 이후 성장률이 10%대 중반으로 내려앉는 '속도 조정 구간'에 진입했다.
특히 2024년 글로벌 판매 증가율은 16.6%에 그치며 폭발적 성장기에서 안정적 성장기로 이행하는 과정의 진통을 겪고 있다.
독일 경제연구소(DIW) 등 주요 기관들은 기술적 성숙도가 대중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정책적 인센티브가 감소할 때 캐즘의 골이 더욱 깊어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국내 시장의 지표는 더욱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산업통상자원부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국내 친환경차 내수는 65만 대로 전년 대비 18.2% 증가했으나, 세부 내용을 보면 하이브리드 모델이 49만 대(31.6% 증가)로 전체의 70% 이상을 점유하며 시장을 견인했다.
반면, 같은 기간 순수 전기차(BEV) 내수는 약 14만 대로 전년 대비 10.3% 감소하며 점유율이 낮아졌고 성장세 또한 확연히 둔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소비자들이 전기차의 대안으로 하이브리드를 선택하며 캐즘 구간이 해소될 때까지 관망세를 유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정치적 변수와 산업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 분석
캐즘 구간의 불확실성은 정치적 변수에 의해 더욱 가중되고 있다.
미국 대선과 유럽의 규제 재조정 등 정치적 리스크에 따라 EV 보조금과 배출 규제가 완화되거나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일부 소비자와 기업의 투자·구매 결정이 지연되는 모습이 관측된다.
이로 인해 대규모 R&D와 설비 투자를 진행한 배터리 셀 업체와 소재 기업들은 가동률 하락과 수익성 악화라는 이중고를 겪으며 투자 계획을 재검토하고 있다.
KBR Insight
현재의 전기차 시장은 단순한 수요 정체가 아닌, 대중 시장으로 진입하기 위한 체질 개선의 과정에 있다. 기업들은 기술력 과시형 마케팅에서 벗어나,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 가격 경쟁력과 충전 편의성을 제공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이 시기를 견뎌내는 기업이 향후 주류 시장의 패권을 잡게 될 것이다.
캐즘 돌파를 위한 전략적 대응과 향후 전망
BNEF와 SNE리서치의 중기 전망을 종합하면, 주요 시장의 성장 둔화와 정책 불확실성은 향후 수년간 이어질 수 있으며 2020년대 중반까지는 ‘조정기’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산업계는 다음과 같은 전략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1) 가격 저항 완화를 위한 보급형 모델 확대
현대자동차와 기아가 보급형 전기차(EV3, EV4 등)를 출시하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LFP(리튬인산철) 배터리 탑재를 확대하는 것은 가격 장벽을 낮추기 위한 대표적인 포석으로 평가된다.
2) 인프라 투자와 충전 불안 해소
현재 각국 정부와 민간 사업자는 고속도로 급속충전소와 도심·주거 단지 내 인프라 확충 계획을 추진 중이며, 이러한 투자가 소비자들의 ‘충전 불안(Range Anxiety)’을 완화하는 핵심 과제로 지목된다.
3) 차세대 기술 상용화 속도 조절
전고체 배터리 등 차세대 에너지 저장 장치의 상용화 속도와 각국 정부의 지속적인 인프라 지원은 캐즘 구간을 얼마나 짧게 가져갈지 좌우하는 결정적 변수로 거론된다.
4) 소프트웨어 및 사용자 경험 강화
하드웨어의 성능 경쟁을 넘어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으로의 전환을 통해 차량의 잔존 가치를 높이고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결론 : 시장 성숙을 위한 필수 조정기와 미래의 과제
결론적으로 캐즘은 모든 파괴적 혁신 제품이 거쳐야 하는 성장의 통과의례와 같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그러했듯, 지금의 전기차 수요 둔화는 시장의 종말이 아닌 대중화를 위한 숨 고르기 단계다.
2026년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 조정기 동안 기업은 원가 절감과 품질 안정화에 매진해야 하며, 정부는 일관된 친환경 정책 기조를 유지하여 시장의 신뢰를 뒷받침해야 한다.
캐즘이라는 거대한 골짜기를 메우는 힘은 결국 기술적 우위가 아닌 소비자들의 신뢰와 실질적인 사용 편익에서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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