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CSRD·IFRS S1/S2 글로벌 규범 현실화... 홍보(PR) 넘어선 '리스크 관리' 차원의 투명한 커뮤니케이션 전략 시급
'골든타임'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2025년 12월, 대한민국 재계는 그 어느 때보다 숨 가쁜 연말을 보내고 있다.
당초 올해부터 가시화될 예정이었던 국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 의무화가 금융당국의 결정으로 2026년 이후 단계적 시행으로 조정되었지만, 현장의 긴장감은 오히려 높아졌다. 이는 단순한 '유예'가 아니라,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거대한 파고 앞에서 기업 내실을 다질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임을 기업들이 직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2024년 회계연도부터 유럽연합(EU)의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이 단계적으로 시행되면서, 2025년은 한국 기업에도 그 영향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 해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기업들에게 ESG는 이제 '착한 기업'을 증명하는 배지가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한 '생존 면허'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 기업들의 소통 방식은 여전히 과거의 문법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화려한 인포그래픽과 '2050 탄소중립'이라는 먼 미래의 약속으로 채워진 수백 페이지의 보고서가 쏟아지지만, 시장의 신뢰는 좀처럼 쌓이지 않고 있다.
이번 심층분석에서는 2025년 한 해를 결산하며, 한국 기업들의 ESG 커뮤니케이션 실태를 심층 진단하고 글로벌 기업들과의 비교를 통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한다.
1. '보고서 공화국'의 역설과 그린워싱의 그늘
한국 기업들의 ESG 대응 속도는 외형적으로 볼 때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속빈 강정'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양적 팽창 속 질적 과제
한국ESG기준원(KCGS)과 한국거래소 등의 자료를 종합하면, 2024년 기준 국내 자산 2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발간율은 약 99%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추산된다. 사실상 해당 규모의 모든 기업이 보고서를 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중 글로벌 수준에 부합하는 고도화된 제3자 검증을 거친 비율은 EU 등 선진국 대비 아직 낮은 편이다. 보고서의 양은 늘었지만, 그 안에 담긴 데이터의 신뢰도는 여전히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증가하는 '그린워싱' 경고등
환경부와 관련 기관의 데이터에 따르면, 부당한 환경성 표시·광고(그린워싱) 적발 건수는 2021년 대비 2024년 기준 3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들이 '친환경', '에코', '무독성' 등의 용어를 마케팅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명확한 과학적 근거는 부족한 경우가 많다는 의미다.
소비자의 눈높이 상승
대한상공회의소 등의 조사 결과, MZ세대와 알파세대를 포함한 소비자의 60% 이상이 "기업의 ESG 활동이 보여주기식에 불과하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기업의 커뮤니케이션이 소비자의 높아진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KBR Insight
2025년의 ESG 커뮤니케이션은 '무결점'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결점'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투자자와 소비자는 완벽한 기업을 찾는 것이 아니다. 당면한 기후 리스크가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고, 이를 해결할 구체적인 로드맵과 현재의 진척률을(설령 그것이 목표에 미달했더라도) 가감 없이 공개하는 기업에 신뢰를 보낸다.
2. 글로벌 vs 국내 사례 심층비교: '철학'과 '숙제'의 차이
글로벌 선도 기업들은 ESG를 기업의 존재 이유(Purpose)와 일치시키며 스토리텔링에 성공한 반면, 많은 국내 기업들은 규제 대응을 위한 '숙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차이는 커뮤니케이션의 깊이를 결정짓는다.
글로벌 선진 사례: 데이터에 철학을 입히다
파타고니아(Patagonia) - '진정성'의 교과서
파타고니아는 단순히 환경 보호를 외치는 것을 넘어, 자사의 의류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염을 구체적인 수치로 공개한다. "우리는 지구를 되살리기 위해 사업을 한다"는 미션 아래,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자는 캠페인은 역설적으로 충성 고객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이익을 위해 환경을 파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며, 이를 투명하게 공시한다.
유니레버(Unilever) - 투명한 공급망 공개 유니레버는 비즈니스 성장과 지속가능성을 통합한 전략을 통해 제품의 원료 채취부터 폐기까지 전 과정(LCA)의 데이터를 투명하게 공개한다. 특히 공급망 내 인권 문제나 팜유 채취 과정의 이슈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루며 해결 과정을 공유한다.
국내 기업의 명과 암: SK의 도전과 여전한 한계
SK그룹 - 데이터 경영의 선구자
국내 기업 중에서는 SK그룹의 행보가 돋보인다. 최태원 회장의 주도로 시작된 '사회적 가치(Social Value, SV)' 측정은 그룹의 핵심 경영 지표로 자리 잡았다.
2023년 기준 SK가 창출한 사회적 가치는 약 16조 8,000억 원으로 발표되었는데, 주목할 점은 경제간접 기여성과가 전년 대비 17% 감소하며 전체 SV가 약 15% 줄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황 부진 등 불리한 수치도 투명하게 공개하고, 대신 사회성과 분야의 성장을 강조하는 전략은 시장에 신뢰를 주는 좋은 사례다.
일반적인 한계 - '이중 중대성'의 부재
그러나 다수의 기업들은 여전히 천편일률적인 보고서 작성에 그치고 있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기업 활동이 환경·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외부 요인이 기업 재무에 미치는 영향을 동시에 고려하는 '이중 중대성(Double Materiality)' 평가를 요구하지만, 국내 보고서는 여전히 긍정적인 사회공헌(CSR) 나열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3. 왜 소통은 겉도는가?
국내 기업들이 ESG 커뮤니케이션에서 '그린워싱'의 덫에 걸리거나 '소통 부재'의 늪에 빠지는 근본적인 원인은 조직 구조와 인식의 괴리에 있다.
1) 조직 간 사일로(Silo)와 전문성 부족
많은 기업에서 ESG 데이터를 관리하는 부서와 이를 외부로 알리는 홍보 부서가 분리되어 있다. 실무 부서는 복잡한 기술적 데이터를 생산하지만, 홍보 부서는 이를 매력적인 마케팅 언어로 포장하려다 보니 본질이 왜곡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전문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의 홍보는 필연적으로 과장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2) 데이터 인프라의 미비 (Scope 3)
글로벌 스탠다드는 이제 자사 직접 배출(Scope 1)과 구매 전력(Scope 2)을 넘어, 공급망 전체와 제품 사용 단계까지 포함하는 'Scope 3' 배출량 공시를 요구한다. 그러나 많은 한국 기업들이 여전히 수작업으로 데이터를 취합하고 있어 데이터의 정합성(Integrity)을 보장하기 어렵다.
3) '그린허싱(Greenhushing)'의 확산
최근에는 그린워싱 비판을 우려해, 실제로 수행하고 있는 ESG 활동조차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비공개하는 '그린허싱'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말했다가 본전도 못 찾는다"는 보신주의가 확산되면서, 오히려 시장과의 소통이 단절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4. 향후 전망 및 시사점: '공시'를 넘어 '공감'으로 가는 길
2026년 이후 본격화될 공시 의무화 시대, 한국 기업들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은 완전히 새로워져야 한다.
규제 대응을 넘어선 '글로벌 표준' 준수
EU CSRD는 기존 비재무정보공시지침(NFRD)을 대체하며, 1,100개 이상의 데이터 포인트를 요구할 정도로 공시 수준을 재무보고와 비슷한 단계로 끌어올리고 있다. 또한, 2023년 공표된 IFRS S1·S2가 2024년부터 적용 가능해지면서, 2025~2026년 사이 각국 제도에 빠르게 반영되고 있다. 기업들은 이를 단순한 규제가 아닌 새로운 글로벌 비즈니스 문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EU 역외 적용 대비
특히 EU 내 자회사를 두거나, EU에서 채권·주식을 발행해 일정 매출 기준을 충족하는 한국 기업은 2028~2029년 회계연도부터 모회사 차원의 CSRD 공시 의무가 직접 발생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선제적 대비가 필수적이다.
국내 제도와의 정합성 국내에서도 IFRS S1·S2를 반영한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 제정 작업이 진행 중이며, 2025년 이후 단계적 도입이 예상된다. 따라서 기업들은 '보여주기'식 홍보가 아닌, ERP(전사적자원관리) 시스템에 ESG 모듈을 통합하여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관리하는 디지털 인프라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
결론적으로, 2025년 현재 한국 기업들의 ESG 커뮤니케이션은 중대한 전환점에 놓여 있다. 양적인 성장은 달성했으나, 질적인 성숙함과 진정성은 여전히 보완이 필요하다. ESG는 기업 이미지를 위한 화장술이 아니라, 기업의 체질을 바꾸는 수술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화려한 미사여구가 아닌 투명한 데이터, 그리고 실패를 인정하고 개선하려는 솔직한 태도다.
글로벌 자본은 이제 '보여주기식 쇼'를 하는 기업과 '진정한 변화'를 꾀하는 기업을 냉정하게 구분하고 있다.
2026년 이후 본격화될 공시 의무화의 파고를 넘기 위해, 우리 기업들은 지금 당장 '포장지'를 벗어 던지고 있는 그대로의 '알맹이'로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 신뢰야말로 위기 속에서 기업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자본이기 때문이다.

![이제 ESG 경영의 성패는 화려한 홍보가 아닌, 철저한 데이터 '검증'과 선제적인 '리스크 관리'에 달려 있다. 투명한 정보 공개만이 시장의 신뢰를 얻는 유일한 길이다. [사진 = 코리아비즈니스리뷰DB]](https://epzvqcvbpcduaglyoici.supabase.co/storage/v1/object/public/news-images/legacy-cgi/2025/12/22/1766367505_27789.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