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했던 유럽의 기술 규제 리더십이 미국의 통상 압박과 빅테크 기업들의 로비 앞에서 점차 그 힘을 잃어가고 있음을 상징한다. AI 칩셋 위에 놓인 법의 저울은 혁신과 규제 사이에서 균형을 잃고 표류하는 현재 EU의 정책 딜레마를 보여준다.
유럽연합(EU)이 자랑하던 강력한 기술 규제 리더십, 이른바 '브뤼셀 효과(Brussels Effect)'가 2025년 말 현재,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세계 최초의 포괄적 인공지능 규제인 'AI법(AI Act)'을 비롯해 디지털서비스법(DSA), 디지털시장법(DMA) 등 EU의 핵심 테크 정책들이 미국의 강력한 압박과 내부의 이해관계 충돌로 인해 사실상 멈춰 섰거나 대폭 후퇴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 8월, 미국과 유럽 간 체결된 새로운 관세 협정 이후 이러한 기류는 더욱 뚜렷해졌다. 트럼프 행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전방위적인 로비를 통해 EU의 규제 장벽을 허물고 있으며, 이에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는 사실상 '식물 상태'로 한 해를 마감할 위기에 처했다.
코리아비즈니스리뷰에서는 현재 EU 기술 정책이 직면한 위기 상황과 그 배경, 그리고 향후 전망을 심층 분석한다.
'이빨 빠진 호랑이' 전락하나... EU AI법 시행 연기론 부상
2024년 8월 발효된 EU의 AI법(AI Act)은 전 세계 기술 규제의 표준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완전한 시행을 앞두고 로드맵이 흔들리고 있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2026년 중간 단계를 거쳐 2027년 8월에 전면 시행되어야 하지만, 현재 분위기는 징벌적 조항의 적용 시점을 늦추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주요 외신 보도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규제 가이드라인을 단순화한다는 명목으로 '디지털 옴니버스(Digital Omnibus)' 패키지를 준비 중이며, 이 과정에서 AI법의 핵심인 처벌 규정 적용을 2026년 8월에서 2027년 8월로 1년 유예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토마스 레니에(Thomas Regnier) EU 디지털 주권 대변인은 11월 7일 브리핑에서 "인공지능 분야의 변화 속도가 매우 빠르며, 표준 제정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이는 산업계와 회원국들의 우려를 반영한 것으로, 표면적으로는 '준비 시간 부여'를 내세우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압박과 자국 내 기술 기업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후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통신 시장 통합의 좌절: 디지털 네트워크법(DNA) 표류
2025년 말까지 약속되었던 디지털 네트워크법(DNA) 역시 안갯속이다. 당초 유럽 내 통신 시장을 단일화하고 빅테크 기업과 통신사 간의 망 사용료 등 공정한 시장 조건을 조성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회원국 간의 이견으로 인해 2026년 1월 이후로 논의가 미뤄졌다.
가장 큰 걸림돌은 구리선 네트워크(Copper networks)의 폐쇄 시점과 유럽 전자통신규제기구(BEREC)의 권한 강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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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선 폐쇄: 독일은 2030년이라는 기한이 현실적으로 너무 이르다며 강력히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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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권한 중앙화: 각국 규제 당국은 시장 상황의 특수성을 이유로 BEREC의 권한 강화에 난색을 보이고 있다. 이는 실상 자국의 통신 시장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는 '밥그릇 지키기'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망 중립성 규칙 개정안은 현재 초안에서 사라졌으며, 통신사와 빅테크 간의 시장 균형을 맞추려던 시도 또한 흐지부지되고 있다. 단일 통신 시장이라는 유럽의 꿈은 점점 멀어지는 형국이다.
美 행정부의 노골적 개입: 우주법과 주파수 전쟁
미국의 견제는 단순히 빅테크 기업 차원을 넘어 정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미 국무부는 최근 EU 우주법(EU Space Act) 초안에 대해 "미국 기업의 활동 범위를 제한하여 협력을 저해한다"며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미 국무부는 13페이지에 달하는 문서를 통해, EU 우주법이 지난 8월 체결된 관세 협정의 정신을 위배한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이는 유럽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무역 보복이 뒤따를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미국은 유럽이 독자적인 규제를 구축하기보다 미국 정부 및 산업계와 '더 원활한 협력'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6GHz 대역 주파수를 둘러싼 전쟁에서도 미국 빅테크의 승리가 점쳐진다. 애플, 브로드컴, 시스코 등 미국 기업들이 주축이 된 와이파이(Wi-Fi) 진영을 위해 미 국무부가 직접 나섰다. 이들은 해당 주파수 대역의 절반 가까이를 와이파이용으로 할당할 것을 요구했으며, VR(가상현실) 및 클라우드 게이밍과 같은 미국 주도의 신산업 육성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MLex 보도에 따르면, EU 27개국 중 13개국만이 모바일 통신사 편을 들었을 뿐, 나머지는 기권하거나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최종 결정권은 집행위원회에 있으나, 미국의 압박을 무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빅테크의 항전과 DSA·DMA의 무력화 우려
이러한 지연 전략은 트럼프 행정부의 지원 사격으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미 연방거래위원회(FTC)는 이미 지난 8월, EU의 DSA 규정이 미국 시민의 표현의 자유와 안보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경고한 바 있다. 이는 유럽의 규제가 미국법과 상충될 경우, 미국 기업 보호를 우선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흔들리는 '브뤼셀 효과', 기로에 선 유럽의 디지털 주권 유럽연합(EU) 깃발의 별들이 디지털 파편이 되어 흩어지는 모습의 이미지. [이미지 = 코리아비즈니스리뷰 DB]](https://epzvqcvbpcduaglyoici.supabase.co/storage/v1/object/public/news-images/legacy-cgi/2025/11/25/1764035558_32664.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