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의 핵심가치는 벽에 걸린 액자일 뿐이다."
수많은 기업의 구성원들이 공공연하게 내뱉는 이 말은, 조직문화 구축의 가장 뼈아픈 실패를 상징한다.
기업들은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 비전과 미션을 수립하고 그럴듯한 핵심가치를 선포하지만, 왜 현장에서는 이것이 공허한 구호로 전락하는가?
대부분의 컨설팅과 진단은 그 원인을 '구성원의 내재화 실패'나 '중간관리자의 전파 노력 부족'에서 찾는다.
하지만 이는 증상일 뿐,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다. 코리아비즈니스리뷰(KBR) 경영연구소는 이 문제의 핵심이 임원(C-Level 및 고위 경영진)에게 있음을 강력히 제기한다.
핵심가치의 실천은 피라미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Bottom-up)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강력하게 흘러내리는 하향식(Top-down) 폭포수와 같다. 그리고 그 폭포수의 수원을 틀어쥐고 있는 존재가 바로 임원이다.
임원의 실천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한 '솔선수범'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조직의 '시스템'과 '자원 배분'을 결정하는 실질적인 설계자이기 때문이다.
솔선수범을 넘어서: 임원의 행동이 갖는 '시스템적 증폭 효과'
흔히 리더십의 덕목으로 '솔선수범'을 이야기한다. 리더가 먼저 행동으로 보여야 구성원들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사실이다. 하지만 임원의 영향력은 단순한 '모범 보이기'를 초월한다.
알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의 사회적 학습 이론(Social Learning Theory)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의 행동을 관찰하고 모방함으로써 학습하며, 이때 관찰 대상의 '지위(Status)'가 높을수록 모방 효과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팀장이 핵심가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한 팀이 영향을 받지만, 임원이 가치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사업부 전체, 나아가 회사 전체의 가치 기준이 흔들린다.
예를 들어, '고객 중심'이 핵심가치인 회사에서 한 임원이 단기 실적 달성을 위해 고객의 장기 이익에 반하는 의사결정을 내렸다고 가정해 보자.
구성원들은 무엇을 학습하는가? '고객 중심이라는 가치보다 임원의 단기 실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학습한다.
이것이 바로 '임원의 증폭 효과(Executive Amplification Effect)'다.
임원의 말과 행동은 그 자체로 '보상받는 행동'의 기준이 되며, 조직 전체에 가장 빠르고 강력하게 전파되는 '공식적 지침'이 된다. 그들의 행동은 단순한 모범이 아니라, 조직이 실제로 작동하는 '암묵적 규칙(Unwritten Rules)'을 정의한다.
핵심가치는 '말'이 아닌 '시스템'으로 구현된다: 임원의 진짜 역할
임원이 핵심가치 실천에 가장 중요한 이유, 그 본질은 그들이 '조직 시스템의 설계자(System Architect)'라는 데 있다.
핵심가치는 포스터나 슬로건이 아니라, 채용, 평가, 보상, 승진, 예산 배분이라는 구체적인 시스템을 통해 조직의 DNA에 이식된다. 그리고 이 시스템의 설계와 최종 승인 권한은 오롯이 임원진에게 있다.
1. 평가 및 보상 시스템 임원들이 '협업'을 핵심가치로 선포하고도, 평가 시스템은 철저한 개인 성과 위주로 운영한다고 가정해 보자. 심지어 타 부서의 실패를 발판 삼아 자신의 성과를 극대화한 직원을 최고 고과자로 선정한다면, '협업'은 그 순간 사망 선고를 받는 것이다. 임원은 '어떻게(How)' 일했는가(가치 준수)를 '무엇을(What)' 했는가(성과)와 동일한 비중으로 평가하고 보상하는 시스템을 설계하고 작동시킬 책임이 있다.
2. 승진 및 인재 배치 조직 구성원들은 '누가 승진하는가'를 통해 회사의 진짜 가치를 읽는다. 만약 '정직'이 핵심가치임에도 불구하고, 편법과 술수로 단기 실적을 올린 리더가 임원으로 승진한다면, 조직 전체에 '이 회사에서 성공하려면 정직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과 같다. 임원은 핵심가치를 가장 잘 구현하는 사람을 리더로 발탁함으로써 가치의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3. 자원(예산) 배분
'혁신'을 외치면서도, 임원이 기존의 확실한 성공 방식(Cash Cow)에만 예산을 집중하고 새로운 시도나 실패 가능성이 있는 프로젝트의 예산을 전액 삭감한다면, 구성원 중 누구도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임원의 예산 배분 결정은 그 자체로 회사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가장 강력한 선언이다.
실패한 가치 리더십: '조직적 냉소주의'의 탄생
임원의 말과 행동, 그리고 그들이 설계한 시스템이 불일치할 때, 조직에는 치명적인 질병이 발생한다. 바로 '조직적 냉소주의(Organizational Cynicism)'다.
이는 단순한 불만이나 비판이 아니다. '회사의 모든 선언은 우리를 착취하기 위한 위선'이라고 여기는, 조직에 대한 깊은 불신과 경멸의 태도다.
구성원들은 임원이 핵심가치를 자신들의 이익이나 편의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모습을 목격하며 심리적 계약(Psychological Contract)의 파기를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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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위선 감지): "임원 본인도 지키지 않는 가치를 왜 우리에게 강요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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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계 (냉소주의 확산): "핵심가치는 결국 보여주기식 쇼(Show)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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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 (행동 변화): 가치 내재화 노력에 대한 조소, 적극적인 방관, 핵심 인재의 이탈.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2010년대 초반 웰스 파고(Wells Fargo)의 유령 계좌 스캔들이다. 웰스 파고는 '윤리 경영'과 '고객 최우선'을 핵심가치로 내세웠다. 하지만 C-Level 경영진은 비현실적인 교차 판매 목표(Cross-selling)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도록 강력하게 압박하는 보상 시스템을 설계했다.
그 결과, 직원들은 생존을 위해 고객 동의 없이 수백만 개의 유령 계좌를 개설하는 대규모 사기 행각을 벌였다.
이는 임원이 설계한 시스템이 회사가 선포한 핵심가치를 정면으로 배신한 사건이며, 조직적 냉소주의가 어떻게 시스템 붕괴로 이어지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시스템으로 가치를 증명하라: 파타고니아 vs. 엔론
핵심가치를 성공적으로 시스템에 안착시킨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의 차이는 임원의 결단에서 갈린다.
실패 사례: 엔론(Enron)
엔론은 '정직(Integrity)'을 4대 핵심가치 중 하나로 내세웠다. 하지만 엔론의 임원진은 'PRC(Performance Review Committee)'라는 악명 높은 상대평가 시스템을 운영했다. 이 시스템은 매년 하위 15%를 강제로 해고시켰다.
구성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동료를 속이고 실적을 부풀리는 데 혈안이 되었다. '정직'이라는 가치는 생존을 위한 '경쟁'이라는 시스템 앞에서 무력했다. 결국 임원진이 주도한 거대한 회계 부정은 회사를 파멸로 이끌었다.
성공 사례: 파타고니아(Patagonia)
파타고니아의 핵심가치 중 하나는 "불필요한 환경 피해를 유발하지 않는다"이다. 창업자 이본 쉬나드와 경영진은 이 가치를 단순한 구호로 두지 않았다. 100% 유기농 면 사용, 매출의 1%를 환경 단체에 기부('지구세'), 심지어 "이 재킷을 사지 마세요(Don't Buy This Jacket)" 캠페인을 통해 수선과 재활용을 권장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는 단기 매출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임원진이 핵심가치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단기 이익을 포기하고 이를 시스템(공급망, 마케팅, R&D)에 반영한 결정이다. 그 결과 파타고니아는 그 어떤 기업보다 강력한 브랜드 로열티와 조직 문화를 구축할 수 있었다.
결론: 임원, '걸어 다니는 핵심가치'가 되어야 하는 이유
조직문화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른다. 그 흐름의 시작점에 임원이 있다.
임원이 핵심가치 실천에 더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단순한 '모범'의 대상이 아니라 조직의 모든 시스템과 자원 배분의 최종 결정권자이기 때문이다.
임원이 가치를 무시하고 설계한 시스템은 구성원들에게 '가치를 지키면 손해 본다'는 잘못된 신호를 보낸다. 이는 결국 조직적 냉소주의를 낳고, 뛰어난 인재들이 조직을 떠나게 만들며, 웰스 파고나 엔론과 같은 시스템적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이제 리더와 경영진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우리 구성원들은 왜 핵심가치를 실천하지 않는가?"라고 묻기 전에, "나는 핵심가치를 실천하는 것이 구성원에게 가장 유리하도록 시스템을 설계하고 있는가?"라고 말이다.
진정한 핵심가치는 벽에 걸린 액자가 아니라, 임원의 의사결정 매 순간에, 그리고 그들이 승인한 시스템 안에 살아 숨 쉬어야 한다.
임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걸어 다니는 핵심가치' 그 자체가 될 때, 비로소 조직문화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강력한 경쟁력이 될 것이다.

![조직의 핵심가치(Core Values)는 단순히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임원진이 이를 '어떻게' 실천하고 조직의 '시스템'에 반영하는가에 따라 그 성패가 결정된다. [사진 = 코리아비즈니스리뷰 DB]](https://epzvqcvbpcduaglyoici.supabase.co/storage/v1/object/public/news-images/legacy-cgi/2025/10/28/1761614290_81323.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