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의 낡고 먼지 쌓인 전략 보고서들은 과거의 '전략적 부채'를 상징한다. [이미지 = 코리아비즈니스리뷰 자료 이미지]
시계가 10월 말을 넘어서면서, 대부분의 조직은 한 해의 마무리를 준비하며 동시에 차기 년도인 2026년의 청사진을 그리는 분주한 시기에 돌입했다.
연말 결산과 신년 계획 수립은 리더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하고도 고된 연례행사다.
하지만 많은 경영진이 이 시기, 치명적인 함정에 빠진다. 바로, 과거의 실패를 냉철하게 결산하지 않은 채, 미래의 계획부터 서둘러 세우는 것이다.
이는 마치 신용불량 상태를 해결하지 않고 새로운 대출을 받으려는 것과 같다.
조직 내부에 누적된 ‘전략적 부채(Strategic Debt)’를 청산하지 않고 수립된 신년 계획은, 새해가 밝아오기도 전에 이미 실패를 예고하고 있다.
2026년을 진정한 성공의 원년으로 삼으려는 리더와 C-레벨 임원이라면, 화려한 계획(Planning) 이전에 냉혹한 점검(Review)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계획은 왜 매년 ‘그럴듯하게’ 실패하는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 교수가 지적한 ‘계획 오류(Planning Fallacy)’는 조직 관리에서도 어김없이 발견된다.
이는 리더들이 과거의 경험과 데이터를 무시하고 미래의 성과를 과도하게 낙관하는 인지적 편향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기업은 신년 사업 계획을 수립하며 "내년에는 매출 20% 성장", "신사업 진출"과 같은 야심 찬 목표를 설정한다.
그러나 정작 "올해 목표했던 매출 15% 성장은 왜 5%에 그쳤는가?", "야심 차게 시작했던 A 프로젝트는 왜 좌초되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 분석과 책임 있는 결산에는 소홀하다.
신뢰할 수 있는 경영 데이터는 이러한 현실을 뒷받침한다. 예컨대, 프로젝트 관리 협회(PMI)의 2024년 'Pulse of the Profession' 보고서에 따르면, 조직의 프로젝트 중 단 11%만이 본래의 전략적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며, 이 과정에서 평균적으로 예산의 9.9%가 전략과 무관하게 낭비된다고 보고되었다. 이는 수립된 전략이 실행단에서부터 심각하게 누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글로벌 여론조사기관 갤럽(Gallup)의 2023년 연구에 따르면, 자신이 소속된 조직의 핵심 목표와 명확히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직원의 비율은 4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갤럽은 또한, 이러한 연결성을 느끼는 직원들의 업무 몰입도가 그렇지 않은 직원에 비해 평균 3.5배 높다고 분석했다. 이는 최고 경영진의 ‘경영 전략’이 현장의 실행단위까지 제대로 전달되거나 동기부여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결국, 연말연시의 계획 수립이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실패'를 단순히 이월(Rollover)시키는 행위로 전락하는 것이다.
'전략적 부채'는 어떻게 조직을 무너뜨리나
'전략적 부채(Strategic Debt)'란, 단기 성과를 위해 의사결정을 지연하거나 잘못된 관행을 방치함으로써 조직 내부에 누적된 구조적 비효율을 의미한다. 이는 경영학의 '조직 슬랙(Organizational Slack)' 개념과도 일부 연결되나, '전략적 부채'는 특히 책임 회피와 실행 지연으로 인해 발생하는 '악성 비효율'을 지칭하며, 조직의 미래 대응력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독소로 작용한다.
가장 대표적인 증상은 ‘좀비 프로젝트(Zombie Projects)’의 만연이다.
시작할 때는 명분이 있었으나 이미 시장성을 잃었거나 내부 역량으로 감당이 안 되는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담당 임원의 체면이나 매몰 비용(Sunk Cost)에 대한 아까움 때문에 중단시키지 못하는 사업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좀비 프로젝트들은 우수한 인재와 핵심 예산을 지속적으로 빨아들이며, 정작 미래 성장에 필요한 신규 전략 실행을 방해한다.
또한, 불명확한 성과 관리 기준(KPI)과 보상체계 역시 부채를 가중시킨다. 연말 결산 시, 성과가 저조한 이유를 시장 탓이나 외부 환경 탓으로 돌리고, 신년 계획에서 다시 한번 '노력'과 '열정'을 강조하는 문화가 반복된다.
이는 냉철한 데이터 분석 대신 '희망'에 기반한 경영이며, 조직 전체에 '적당주의'와 '책임 회피' 문화를 확산시키는 주범이 된다.
2026년 계획, 두 갈래 길 앞에 선 리더
그렇다면 리더는 이 시점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2026년의 성공을 위한 전략 점검에는 크게 두 가지 상반된 접근법이 존재한다.
시나리오 A: 관성적 답습 (The 'More of the Same' Trap)
이는 가장 손쉽고 익숙한 방식이다. '전년 대비 00% 성장'이라는 목표를 먼저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기존 사업부의 예산과 인력을 비례적으로 배분한다. 작년에 실패한 프로젝트는 '보완하여 재추진'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나고, 성과 지표(KPI)는 숫자만 조금 바뀐 채 그대로 유지된다.
이 방식의 유일한 장점은 '속도'와 '안정성'이다. 조직 내부의 저항이 적고, 계획 수립에 드는 시간이 짧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은, 시장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전략적 부채'를 그대로 안고 간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데, 작년에 하던 대로 돛을 다는 것과 같다. 불확실성이 극대화된 현 경영 환경에서 가장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다.
시나리오 B: 제로베이스 점검 (The 'Zero-Based' Review)
이는 모든 것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2026년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우리가 하는 일 중, 당장 중단해도 되는 일은 무엇인가?(Liquidation)", "시장이 변했는데 우리가 붙잡고 있는 낡은 가정은 무엇인가?(Assumption Test)"를 묻는다.
이 방식은 전년도 예산이나 인력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2026년의 핵심 전략 목표 달성에 필요한 자원만을 제로베이스(Zero-Base)에서 재배치한다. 이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기존의 기득권(사업부, 임원)을 내려놓아야 하며,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는 조직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조직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한정된 자원을 '미래 성장 동력'에 집중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전략적 청산'을 위한 4단계 실행 가이드
리더가 '제로베이스 점검'을 선택했다면, 구체적인 실행 방법이 필요하다.
다음은 단순한 연말 결산을 넘어, 조직의 미래를 바꾸는 '전략적 청산'의 4단계다.
1단계: '재무 결산'이 아닌 '전략적 AAR'을 실시하라
대부분의 연말 결산은 재무제표상의 숫자 맞추기에 급급하다. 그러나 진정한 결산은 미 육군의 'AAR(After-Action Review)' 방식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AAR의 핵심은 '누가 잘못했는가(Who)'를 따지는 '비난(Blame)'이 아니라, '무엇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그 원인은 무엇인가(What & Why)'를 찾는 '학습(Learning)'에 있다.
리더는 모든 구성원이 솔직하게 실패를 공유하고, 계획과 실행 사이의 격차(Gap)를 분석하는 심리적 안전지대를 제공해야 한다.
2단계: '좀비 프로젝트' 식별 및 공개 청산
조직의 자원을 갉아먹는 '좀비 프로젝트'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매우 정치적이고 민감한 작업이다. 따라서 리더는 "이 프로젝트가 지금 시점에서 다시 제안되었다면, 승인할 것인가?"라는 단 하나의 냉정한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명확한 기준에 따라 중단이 결정된 사업은, 조직 전체에 공개적으로 '청산'을 선언해야 한다. 이는 실패를 용인하되, 그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리더의 강력한 신호가 된다.
3단계: 'Anti-Goals(하지 않을 일)' 목록을 작성하라
성공적인 전략은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에 의해 정의된다. 이는 성과 관리 체계가 성숙한 실리콘밸리의 주요 기술기업들이 최고의 아이디어를 선별하고 실행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2026년 신년 계획에는 '집중해야 할 3가지'와 더불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3가지(Anti-Goals)'를 명시해야 한다. 이는 한정된 자원이 분산되는 것을 막고, 조직 전체의 실행력을 핵심 목표에 집중시키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4단계: '단일 계획'이 아닌 '시나리오 플레이북'을 구축하라
2026년 역시 지정학적 리스크, 기술의 급격한 변화, 예측 불가능한 시장 변수(VUCA)로 가득할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1년 치 계획을 정교하게 짜는 것은 무의미하다.
리더는 '단 하나의 정답(Plan A)'을 제시하는 대신, 여러 변수에 대응할 수 있는 '시나리오 플레이북(Scenario Playbook)'을 준비해야 한다.
최상의 시나리오(Best-case), 기본 시나리오(Base-case), 그리고 최악의 시나리오(Worst-case)에 따라 조직이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핵심 행동 지침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2026년, 계획이 아닌 '실행'으로 증명하라
연말 결산과 신년 계획 수립 시즌은 리더의 본질적인 역량을 시험하는 무대다.
단순히 과거를 답습하고 미래를 낙관하는 '관성적 리더'가 될 것인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전략적 부채'를 청산하고 조직의 체질을 바꾸는 '진짜 리더'가 될 것인가.
2026년의 성공은 1월 1일에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2025년의 마지막 분기, 과거의 실패를 얼마나 냉철하게 복기하고, 얼마나 용기 있게 '하지 않을 일'을 결정하며, 얼마나 명확하게 '집중할 것'을 설정하느냐에 달려있다.
화려한 신년 계획 프레젠테이션은 잠시 미뤄두라. 지금 당장 당신의 조직을 갉아먹고 있는 '전략적 부채' 목록부터 작성해 보라.
2026년의 승패는 바로 그 '청산 목록'에서 시작될 것이다. 당신의 조직에도 이 '제로베이스 점검'을 지금 바로 적용해 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