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AI 생성 이미지. [이미지 = 코리아비즈니스리뷰]
일본 정치의 '유리천장'이 마침내 깨졌다.
2025년 10월, 기시다 후미오 내각의 지지율 급락과 자민당(LDP) 내부의 치열한 권력 투쟁 끝에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가 일본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로 공식 취임했다.
G7 국가 중 유일하게 여성 정상이 없었던 일본의 역사적 변곡점이 현실화된 것이다.
'포스트 기시다'를 둘러싼 3파전의 '가능성'을 점치던 시기는 지났다. 이제 관심은 '누가'가 아니라, '다카이치 총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집중된다.
특히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정치적 계승자를 자처하는 그녀가 '사나에노믹스(Sanaenomics)'라는 독자적 경제 정책을 천명하면서, 최근 해빙기를 맞았던 한일 관계는 '경쟁적 공존'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다카이치 내각의 출범은 한국 경제계에 중대한 시그널을 보낸다.
반도체, 배터리 중심의 공급망 협력을 넘어 AI, 에너지 안보, 핵심 기술 자립 등 경제 안보 축이 강화되면서, 양국 관계는 협력과 견제가 복잡하게 얽힌 고차방정식에 돌입했다.
이번 심층분석에서는 2025년 10월 23일 현시점을 기준으로, 다카이치 내각의 출범 과정과 핵심 정책 기조를 팩트체크 기반으로 심층 분석하고, 이것이 한일 경제 협력에 미칠 영향을 집중적으로 진단한다.
1. '유신회'와 손잡은 불안한 출범과 '친정 체제' 구축
다카이치 내각의 탄생은 기시다 전 총리의 리더십 붕괴로 예견된 수순이었으나, 그 과정은 험난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10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한 뒤, 국회 총리 지명 선거 결선 투표에서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전 총리를 누르고 중의원 과반(237표)을 확보하며 일본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로 공식 선출됐다.
그러나 내각 출범은 순탄치 않았다. 전통적 연립 파트너였던 공명당이 이탈하면서 자민당 단독으로는 과반 의석 확보가 불투명했다.
결국 일본유신회(日本維新の会)와 '각외 협력(閣外協力)' 형태의 정책 연대를 구축하며 가까스로 정권 출범에 성공했다. 이는 향후 일본유신회의 정책적 요구가 다카이치 내각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불안 요소로 작용할 전망이다.
내각 인선은 '안배'보다 '친정 체제' 구축에 무게를 뒀다.
차기 경쟁자로 거론되던 가미카와 요코(上川陽子) 전 외무상은 이번 내각 명단에서 제외됐다. 대신 자민당 내 실력자인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전 간사장이 외무상으로 기용됐으며, 총리의 '입'인 관방장관에는 기하라 미노루(木原稔) 전 방위상이 내정되는 등 핵심 요직이 측근들로 채워졌다.
이는 다카이치 총리가 자신의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2. '사나에노믹스'의 전방위적 개혁 청사진
다카이치 총리의 정책은 과거 단순 '강경 우익'으로 분류되던 것과 달리, 집권 이후 '아베 계승 + 구조 개혁'이 혼합된 '사나에노믹스'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는 한일 관계를 전망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변수다.
'사나에노믹스'의 핵심 기조는 '아베노믹스 계승'을 표방한 적극적 확장 재정과 강력한 경제 안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내각 출범과 함께 발표된 정책 초안에는 (1)디지털·AI 기반의 과감한 행정 개혁, (2)경직된 농림·노동 시장 및 재정 정책의 전방위적 개편, (3)원자력 발전소 재가동을 포함한 에너지 자립 강화 방안이 명시되었다.
이는 단순한 경기 부양을 넘어 엔화 약세 기조 속에서 일본 사회의 구조적 개혁을 포괄하는 전방위 정책이다.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경제 안보'다.
이 기조는 기시다 내각 시절 제정된 '경제안보추진법'에 기반한다. 다카이치 총리가 당시 경제안보상으로서 이 법의 입안을 주도했으며, 이번 내각은 이 법의 실행을 가속화할 전망이다. 2019년과 같은 직접적 수출 규제보다는, 이 법을 근거로 첨단 기술의 자국 중심 재편에 속도를 낼 것이 확실시된다.
3. '잠재적 경쟁자'들의 엇갈린 행보
다카이치 내각의 출범으로 기존의 '총리 후보군'은 해체됐지만, 물밑 경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번 내각에서 배제된 가미카와 요코 전 외무상은 기시다파의 명맥을 잇는 온건파로서, 다카이치 내각의 강경 노선에 대한 당내 비판 세력의 구심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녀는 한일 관계 개선의 실무를 담당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차기 주자로서의 입지를 다질 것으로 보인다.
반면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는 중앙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잠재적 정치 경쟁자' 수준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과거 일부에서 그녀를 '실용주의자'로 분류했으나, 이는 '도쿄 행정의 실리'에 국한될 뿐이다.
외교 및 역사 문제에 있어서는 다카이치 총리 못지않은 강경 보수 성향을 보여왔으며, 특히 독도나 위안부 등 과거사 이슈에서는 매우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해왔다. 한일 경제 협력 확대보다는 도쿄의 실리를 우선하는 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KBR Insight: '최초 여성 총리'라는 상징, 그 이면의 냉철한 실리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등장은 분명 일본 사회의 거대한 진보다. 그러나 '여성 리더십'이라는 상징이 곧 온건함이나 유연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카이치 총리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아베 레거시(유산)'를 강화하고, '사나에노믹스'를 통해 경제 안보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한국 경제계는 '여성 총리'라는 상징에 대한 막연한 기대 대신, '다카이치 총리'라는 현실적 정치인의 정책 노선에 집중해야 한다.
그녀가 추진하는 행정 개혁, 노동 시장 개편, 에너지 자립 정책은 한국 기업에 새로운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제공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여성'이라는 점이 아니라, 그녀가 '아베이즘의 계승자'이자 '경제 안보론자'라는 사실이다.
4. 향후 전망 및 시사점: '경쟁적 공존' 시대, AI·에너지 안보가 새 변수
다카이치 내각의 출범으로 한일 경제 관계는 '전략적 동반자'라기보다는 '경쟁적 공존(Competitive Coexistence)' 국면에 공식 진입했다.
과거 기시다 정권 하에서 논의되던 반도체·배터리 중심의 공급망 협력은 '현상 유지'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한일 공급망 협의체는 유지되겠지만, 그 중심축은 이미 새로운 분야로 이동하고 있다.
새로운 핵심 변수는 AI, 에너지 안보, 그리고 사이버 안보다.
첫째, AI 기술 패권이다.
'사나에노믹스'가 AI를 행정 개혁과 경제 안보의 핵심으로 규정하면서, 이는 네이버 라인(LINE) 사태에서 보았듯이 한국의 AI 플랫폼 및 기술 기업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견제와 압박이 거세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둘째, 에너지 안보다.
다카이치 총리는 원자력 발전소 재가동과 에너지 자립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이는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과 유사한 과제로, 양국이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서 경쟁하거나, 혹은 제3국 자원 개발에서 전략적으로 협력해야 하는 중대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일본 정부는 AI, 에너지, 핵심 기술 자립을 경제안보의 중심축으로 설정했다. 다만 '기술 블록화'와 같은 배타적 공급망 구축은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으며, 이는 전략적 방향성을 모색하는 수준으로 평가된다.
결론적으로, 다카이치 내각의 일본은 '강한 일본'을 목표로 경제 안보와 기술 자립을 내세운 공세적 파트너로 변모했다.
한국 정부와 기업은 과거의 협력 공식에서 벗어나, AI와 에너지 안보라는 새로운 격전장에서 '경쟁'과 '공존'의 균형점을 찾는 고도의 전략적 대응을 요구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