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세계 산업계가 직면한 가장 시급하고도 어려운 과제는 단연 '탈탄소(Decarbonization)'다.
특히 철강, 시멘트와 같은 중공업 분야는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34%를 차지할 정도로 그 책임이 막중하지만, 탄소 배출 저감은 기술적, 경제적 장벽이 높아 쉽게 해결되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혁신 기술, 즉 '기후테크(Climate Tech)'에 대한 투자가 잠시 주춤하는 현상까지 나타나면서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새로운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다.
바로 전 세계 물류의 심장부 역할을 해온 '해상 항만'이 그 주인공으로, 이들이 단순한 물류 거점을 넘어 산업 기후 기술 솔루션을 발전시키는 혁신 허브로 거듭나고 있다.
산업계 탈탄소의 난제와 기후테크 투자의 현실
산업 부문의 탈탄소화는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임이 분명하다.
막대한 자본 투자와 혁신적인 기후 기술, 그리고 이를 상용화할 수 있는 규모의 경제가 모두 성공적으로 맞물려야 하기 때문이다.
PwC가 발표한 '2024 기후 기술 현황(State of Climate Tech 2024)' 보고서에 따르면, 산업 부문의 기후 기술에 대한 투자는 2023년 120억 달러에서 2024년 30억 달러로 무려 75%나 급감하는 등 시장의 위축이 현실로 나타났다. 이는 전반적인 기후테크 투자 시장의 거품이 빠지고 투자자들이 더욱 신중하고 선별적인 접근을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투자 감소는 특히 기술 증명 단계를 지나 상용화를 앞둔 스케일업(Scale-up) 단계의 스타트업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수소 전기분해, 탄소 포집 및 저장(CCS), 장주기 에너지 저장 장치와 같은 핵심 기술들은 아직 투자자들에게 확실한 신뢰를 주기에는 성숙도가 부족한 실정이다.
150년 이상 유지되어 온 기존 산업 및 에너지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막대한 규모의 자본과 인적 자원이 필요하며, 이는 개별 기업이나 스타트업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도전이다. 따라서 이 거대한 전환을 이끌어내기 위한 새로운 플랫폼과 촉매제의 등장이 절실한 상황이다.
새로운 해법으로 떠오르는 '항만'의 잠재력
바로 이 지점에서 '항만'이 에너지 전환의 기회와 도전을 동시에 마주하며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PwC UK의 Strategy& 컨설팅 비즈니스 자문 이사인 슈리쿠마르 라크싯(Shreekumar Rakshit)은 "항만은 전 세계 상품의 80%가 통과하는 글로벌 경제 시스템의 핵심"이라며, "에너지 전환은 항만에게 기존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통적으로 항만은 원유나 제철용 석탄과 같이 탄소 집약적인 원자재 및 에너지 운송량 감소라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동시에 항만 자체 운영을 탈탄소화하기 위해 태양광 에너지 도입, 장비 전기화 등 자체적인 투자와 프로세스 개선도 요구받는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거대한 기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항만은 광활하고 전략적인 위치에 자리 잡은 유휴 부지를 활용하여 육상 풍력 터빈이나 탄소 포집 및 저장 시설과 같은 대규모 기후 기술 인프라를 구축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즉, 항만은 감소하는 탄소 집약적 화물의 수익을 대체할 대안으로 바이오 연료 정제 공장이나 재생 에너지 허브를 개발하며 스스로 '녹색 에너지 허브(Green Energy Hub)'로 진화할 잠재력을 품고 있는 것이다.
영국 최대 항만 운영사 ABP의 혁신 전략
영국의 최대 항만 소유 및 운영 기업인 ABP(Associated British Ports)는 이러한 변화를 선도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ABP의 전략 및 지속 가능성 그룹 책임자인 맥스 해리스(Max Harris)는 "ABP의 항만들은 온실가스 배출량이 매우 높은 영국의 주요 산업 클러스터 중심에 위치해 있다"며, "지속 가능하고 수익성 있는 비즈니스를 유지하면서 배출량을 줄이는 것이 모두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ABP는 항만이 해상풍력, 수소, 탄소 포집과 같은 청정에너지 기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 아래, 에너지 전환 시대에 그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ABP는 2040년까지 자체 운영의 넷제로(Net-Zero) 달성을 목표로 6억 파운드를 투자하는 등 과감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는 단순히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넘어, 8,600에이커에 달하는 방대한 토지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비즈니스 전략과 맞닿아 있다. 대표적인 예로, 사우샘프턴 항구에서는 버라이즌(Verizon)과 협력하여 영국 산업 현장 최초의 사설 5G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터미널 운영 시스템을 최적화하여 차량이 선박에서 보관 장소로 이동하는 경로를 시간, 비용뿐만 아니라 '탄소 배출량'을 기준으로 관리함으로써 공급망 비용 절감과 이산화탄소 감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또한, 포트 탤벗(Port Talbot) 항구에서는 부유식 해상풍력(Floating Offshore Wind)이라는 새로운 산업의 성장을 지원하고 있다. 해저에 고정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터빈을 거대한 부유 구조물 위에 세우는 이 기술은 더 깊은 바다의 우수한 바람 자원을 활용할 수 있게 한다.
축구장 크기의 부유 구조물과 에펠탑보다 큰 풍력 터빈을 제작하고 바다로 띄워 보내는 이 거대 엔지니어링 프로젝트의 제조 기지를 바로 항만이 담당하는 것이다. 이는 동남아시아 등에서 제작하여 전 세계로 운송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항만의 입지적 중요성은 절대적이다.
스타트업과 대기업을 잇는 '에너지 벤처 액셀러레이터'
ABP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기후테크 혁신을 항만으로 유치하고 잠재력 있는 스타트업에 투자하기 위한 새로운 모델을 구축했다.
바로 '에너지 벤처 액셀러레이터(Energy Ventures Accelerator)'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소프트웨어가 아닌 하드웨어 기술, 즉 '하드테크(Hard tech)' 분야에서 가장 잠재력 높은 에너지 전환 스타트업을 발굴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ABP는 실리콘밸리의 유명 VC 플랫폼인 플러그 앤 플레이(Plug and Play)와 협력하여 6만 개에 달하는 스타트업 네트워크에 접근하고 있다. 특히 기술을 증명하고 본격적인 스케일업 단계로 도약하려는 시리즈 B 단계의 스타트업을 주요 타겟으로 삼는다.
ABP는 이들에게 장기 계약의 부담을 주는 대신, 파일럿 프로젝트를 위한 부지와 인프라를 제공하고, 나아가 할인된 임대료를 제공하는 대가로 지분을 확보하는 등 유연한 파트너십 모델을 제시한다.
이는 단순히 공간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ABP의 광범위한 고객 기반과 상업 생태계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스타트업이 제품을 판매하고 미래의 핵심 고객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다.
이러한 대기업 주도의 벤처 투자는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하드웨어 기반 기후테크 기업들에게 정부 지원금, 재단 기금 등 다양한 형태의 자본을 유치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미래를 향한 항만 생태계의 과제와 전망
물론 항만이 성공적인 기후테크 허브로 자리 잡기까지는 해결해야 할 과제도 남아있다.
라크싯 이사는 "항만 생태계 전체가 준비되지 않으면 항만 단독으로 탄소 포집 허브와 같은 인프라에 투자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탄소 포집 기술을 사용하려는 산업 사용자들이 대규모로 기술을 도입할 준비가 되어야만, 항만 역시 포집된 탄소를 운송하기 위한 허브에 막대한 투자를 감행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는 결국 항만을 중심으로 한 산업계, 스타트업, 정부, 지역 사회 간의 긴밀한 파트너십과 꾸준한 실험이 선행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결론적으로, 전 세계 투자 환경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인 '어떻게 기후테크 솔루션을 경제적으로 매력적이게 확장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항만이 쥐고 있다. 맥스 해리스는 "항만은 인재, 인프라, 기술의 핵심적인 결절점으로서, 우리의 미래를 변화시킬 새로운 에너지 전환 기술의 발사대이자 착륙 지점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물류의 동맥이었던 항만이 이제는 녹색 산업 혁명을 이끄는 심장으로 거듭나며, 지속 가능한 미래를 향한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고 있다.

![미래형 친환경 스마트 항만의 모습. 전통적인 물류 허브를 넘어 해상풍력, 청정 에너지 저장 시설 등 첨단 기후 기술이 집약된 지속가능한 산업 생태계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이미지 = 코리아비즈니스리뷰 DB]](https://epzvqcvbpcduaglyoici.supabase.co/storage/v1/object/public/news-images/legacy-cgi/2025/10/13/1760360816_44210.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