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스만 : 기아 홈페이지 캡처]
과거 ‘짐차’라는 꼬리표와 함께 변방으로 취급받던 픽업트럭 시장이 꿈틀대고 있다.
KG모빌리티(이하 KGM)가 굳건히 지키던 독점 체제에 기아가 ‘타스만’이라는 강력한 도전장을 내밀면서 약 40년 만에 진정한 경쟁 구도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캠핑과 레저 문화의 확산, 매력적인 세제 혜택, 그리고 강력한 신차들의 등장은 한국 픽업트럭 시장의 잠재력을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국내 자동차 시장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중요한 신호로 해석된다.
1. ‘아는 사람만 타던 차’에서 ‘누구나 넘보는 차’로… 시장의 극적인 반전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에서 픽업트럭은 오랫동안 비주류에 머물렀다. 2022년 기준 국내 픽업트럭의 시장 점유율은 고작 1.8%에 불과했다.
신차 100대 중 1~2명만이 픽업트럭을 선택했다는 의미다. 이는 신차 5대 중 1대가 픽업트럭인 미국 시장(점유율 20.8%)과 비교하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KGM의 렉스턴 스포츠가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였던 시장 구조는 소비자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2025년, 시장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2025년 1월부터 8월까지 국내 픽업트럭 판매량은 1만 7136대로, 전년 동기 대비 약 75%나 급증하며 6년 만에 극적인 반등에 성공했다. 시장의 성장세가 통계로 명확히 확인된 것이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의 중심에는 단연 기아의 신차 ‘타스만’이 있다. 지난 4월 출시된 타스만은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며, 출시 이후 7월까지 6,152대의 누적 판매량을 기록했다.
이는 상반기 전체 픽업트럭 시장의 약 35%에 달하는 점유율로,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성과다. KGM이 독주하던 시장에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하면서, 소비자들의 선택지가 넓어지고 시장 전체의 파이가 커지는 ‘메기 효과’가 현실화된 것이다.

[무쏘EV : KGM 홈페이지 캡처]
2. 춘추전국시대 개막: 국산과 수입의 치열한 각축전
기아 타스만의 등장은 KGM 독주 체제에 균열을 내고, 수입차 브랜드까지 가세한 본격적인 경쟁 시대를 열었다. 이제 소비자들은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다양한 픽업트럭을 놓고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됐다.
국산 픽업의 자존심: KGM 렉스턴 스포츠 & 기아 타스만
시장의 절대 강자였던 KGM의 렉스턴 스포츠는 ‘가성비’와 ‘신뢰성’을 무기로 수성에 나섰다.
2024년까지 시장 점유율 90% 이상을 차지하며 쌓아온 노하우와 데이터는 가장 큰 자산이다. 특히 주 구매층인 50~60대 장년층의 충성도가 높다. 카이즈유데이터랩 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렉스턴 스포츠 구매자의 약 70%가 50대와 60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은퇴 후 전원생활을 즐기거나 캠핑, 낚시 등 아웃도어 활동이 많은 시니어 세대의 라이프스타일과 픽업트럭의 다목적성이 정확히 부합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KGM은 최근 국내 최초의 전기 픽업트럭인 무쏘 EV를 출시하며 친환경차 시장까지 전선을 넓히고 있다.
이에 맞서는 기아 타스만은 세련된 디자인과 합리적인 가격, 그리고 강력한 오프로드 성능을 앞세워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3천만 원 후반에서 5천만 원 초반(3,750만 원~5,240만 원)에 형성된 가격대는 수입 픽업트럭은 물론, 일부 국산 SUV 수요까지 흡수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췄다는 평가다.
최대 3.5톤에 달하는 견인 능력과 험로 주행 성능은 아웃도어 마니아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개성과 성능으로 승부하는 수입 픽업
수입 픽업트럭 시장에서는 쉐보레 콜로라도가 단연 돋보인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콜로라도는 수입 중형 픽업트럭 시장에서 60%가 넘는 압도적인 점유율을 기록하며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특히 GM 한국사업장은 2025년 6월, 신형 콜로라도의 내수 판매가 전년 동월 대비 350% 증가했다고 밝히며 인기를 증명했다.
정통 아메리칸 픽업의 감성을 내세운 포드 레인저와 지프 글래디에이터 역시 꾸준한 수요를 보이고 있으며, 최근에는 GM의 프리미엄 브랜드 GMC가 내놓은 풀사이즈 픽업트럭 시에라가 상반기에만 159대가 판매되며 고급 픽업트럭 시장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콜로라도 Z71-X 에디션 : 쉐보레 홈페이지 캡처]
3. 왜 한국인은 픽업트럭에 열광하기 시작했나?
‘불모지’라 불리던 한국에서 픽업트럭이 이토록 뜨거운 반응을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크게 세 가지 요인을 꼽는다.
첫째, 레저 및 아웃도어 문화의 확산이다.
주 5일 근무제 정착과 워라밸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캠핑, 차박, 서핑, 낚시 등 다양한 야외 활동을 즐기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SUV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많은 양의 짐을 실을 수 있고, 험로 주행에도 강한 픽업트럭은 이들에게 최적의 파트너로 떠올랐다.
둘째, 파격적인 세제 혜택이다.
픽업트럭은 국내법상 ‘화물차’로 분류된다. 덕분에 배기량에 관계없이 연간 자동차세가 2만 8500원에 불과하다. 또한, 차량 가격의 5%에 달하는 개별소비세와 교육세가 면제되며, 취득세율 역시 승용차(7%)보다 낮은 5%가 적용된다. 사업자 명의로 구매할 경우 부가세 10%를 환급받을 수 있어 경제적 이점이 매우 크다.
[KBR Insight]
김필수 대림대학교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과거 픽업트럭은 자영업자나 농업 종사자의 전유물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다목적성과 실용성, 그리고 경제성까지 갖춘 매력적인 패밀리카이자 레저용 차량으로 인식이 전환되고 있다"며, "특히 렉스턴 스포츠의 경우, 중후하고 안정적인 디자인과 다목적 활용성이 은퇴 후 제2의 삶을 준비하는 5060세대의 수요와 맞아떨어지며 시니어 시장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고 분석했다.
셋째, 신차 효과와 선택의 폭 확대다.
KGM의 독점 구조가 깨지고 기아 타스만과 같은 매력적인 신차가 등장하면서 소비자들의 잠재된 구매 욕구를 자극했다. 여기에 KGM 무쏘 EV와 같은 전기 픽업트럭의 등장은 친환경차에 관심이 많은 소비자들까지 픽업트럭 시장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타스만 : 기아 홈페이지 캡처]
4. 성장통과 과제: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조건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 픽업트럭 시장이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남아있다.
가장 큰 논란은 세제 혜택의 형평성 문제다. 1억 원에 육박하는 고가의 수입 픽업트럭까지 화물차로 분류되어 각종 세금 감면 혜택을 받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레저용으로 사용하는 고가 픽업트럭에 대한 과세 기준을 현실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또한, 협소한 국내 도로 및 주차 환경도 픽업트럭 대중화의 걸림돌로 지적된다. 특히 전장이 5미터를 훌쩍 넘는 풀사이즈 픽업트럭의 경우, 도심 운행이나 주차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전동화 전환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도 중요한 과제다. KGM이 무쏘 EV로 첫발을 뗐지만, 아직은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향후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전동화 추세에 맞춰 다양한 전기 및 하이브리드 픽업트럭 라인업을 확보하는 것이 시장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핵심 열쇠가 될 것이다.
한국자동차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국내 픽업트럭 시장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디자인 차별화와 실용성 강화를 통한 상품성 개선, 그리고 친환경차를 포함한 모델 다양화가 필수적"이라고 제언했다.
40년 만에 진정한 경쟁의 서막을 연 한국 픽업트럭 시장이 이러한 성장통을 극복하고 새로운 자동차 문화의 한 축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